숲을 울타리를 삼아 살았던 정가신을 기린 나주의 설재서원
무더운 여름 대낮에는 인적이 드물다. 원님이 살았고 금안동에서 으뜸이라고 원당(元當), 반석 같은 지형에 노송이 많았던 반송(盤松)은 반송(半松)으로 바뀐 나주의 한마을에는 정가신이 터를 잡은 인천(仁川)은 숲을 울타리 삼았다고 한때 이내촌으로 불렸던 곳이다. 돌담으로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예사롭지 않은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상의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 것과 자신의 길을 계속 바꾼 사람과는 다른 것이다. 일관성이 있는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원하는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표정과 태도, 말과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더운 이 시기에 나주의 금안리를 찾아가 보았다. 숲길 오붓하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무더운 여름을 잠시 잊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마음도 느긋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마을에 자리한 설재서원은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93호(1984.02.29 지정)로 지정이 되었는데 설재서원은 문정공 설재 정가신(雪齋 鄭可臣)을 배향하기 위해 1688년(숙종 14) 금안동에 세워졌다. 이후 1693년(숙종 19) 설재선생의 5 세손으로 세종대 효자정려를 받은 경무공(景武公) 영모정(永慕亭) 정식(鄭軾)이 추배 되었다.
그 후 1712년(숙종 38) 여름에 향사우(鄕祠宇)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된 크지는 않은 서원이지만 철폐령으로 사라질뻔했던 옛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1953년 훼철된 지 85년 만에 사론(士論)이 제기되어 서원이 복설 되었다. 이때 초동 팔문관의 한 분인 창주공 정상(滄洲公 鄭詳), 경원공 정여린(慶源公 鄭如麟), 죽우당 정란(竹友堂 鄭瀾)을 추배하고 1988년 삼불의 헌공 정초(三不義軒公 鄭初), 묵재공 정눌(墨齋公 鄭訥)등이 추배 되어 현재에 이른다.
설재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설재사(雪齋祠), 재명문(齊明門), 4칸의 영모재(永慕齋), 정문, 4칸의 고사(雇舍), 3칸의 창고 등이 있다
꾸준하게 배우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50세부터 큰 차이가 난다고 한다. 인간의 내면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익히느냐에 따라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향교나 서원의 공통점은 공자라는 인물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간절함이었다. 마음이 간절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곳에 모셔진 정가신이라는 사람도 인생의 원칙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를 끊임없이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은 “옛것을 좋아해 힘써 그것을 구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은 서원이지만 논어로 읽어보는 세상사에 대해 방송을 들으면서 돌아본다. 요즘에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논어를 많이 찾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고 1분도 채 안 되는 동영상을 탐닉하면서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는 지금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에 있다.
나의 길은 하나로 꿰어 있다(吾道一以貫之)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지만 무엇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달라진다.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한 여름에 나주 설재서원에서 생각해보고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