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국의 왕자 장유화상이 세웠다는 불모산(佛母山)의 장유사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바다를 떠나서 여행을 한다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지금도 전 세계에는 안전하지 않은 여행국들이 있다. 하물며 2,000여 년 전에는 어땠을까. 한국에는 수많은 고대국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로 대표되는 삼국시대라고 말하는 이유는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고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야 6 국도 알려진 것이 적다. 가야국에서 가장 먼저 국가의 기틀을 잡은 것은 김해에 터전을 잡은 금관가야다.
신라보다 강성했던 금관가야는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만든 백제를 공격하던 장수왕이 신라를 도와주면서 깊숙하게 들어왔다가 정복을 당한 후 대가야에 가야의 맹주권을 넘겨주게 된다.
금관가야의 역사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허왕후다. 초기 철기 문명을 받아들여 성장했던 가야국들의 역사 또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존하고 있다. 김해 허 씨의 시조인 허황옥의 고향은 인도 아유타국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녀의 오빠가 왕자인 장유화상이다.
김해의 장유사가 자리한 곳은 불교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불모산에 자리하고 있다. 먼 한반도까지 와서 장유화상은 서기 48년에 가락국에 남방불교를 전파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는 고구려에 북방불교가 전파된 372년보다 무려 3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초기에 국가가 수립될 때 가락국이 다른 국가보다 더 체제가 자리 잡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라는 것이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자리 잡아왔다. 김해시에는 장유화상의 이름을 딴 장유동도 있고 이곳 장유사도 그 이름과 연관이 되어 있다.
올해가 2025년이니 불모산에 장유사를 창건하였다는 48년까지 2,000여 년의 시간의 힘이 있다. 불모산(佛母山)의 자락이라는 용지봉(745m) 준령에서 흘러내리는 수려한 자연경관이 사찰을 둘러싸고 펼쳐져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보았을 때 건물들이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동안 퇴락해 있는 사찰을 1980년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해 현재의 면모를 갖췄다 하니 뒷동산의 사리탑과 기적비를 제외하곤 모두 현대적인 건축물일 수밖에 없다.
가장 늦게 그 틀을 잡은 신라는 가야를 비롯하여 고구려와 백제에게 그냥 약소국에 불과했었다.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불교를 기반으로 체제를 정비했었다.
비슷한 풍경처럼 보여도 사찰마다 모두 다른 색깔이 있다. 김해시 금관가야 수로왕의 재위 연도가 기원후 42년이니 당시에 장유화상은 사찰을 창건하는 등의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붉은 보자기 속에서 6개의 황금알이 있었으며 이 알들은 6명의 왕이 되어 여섯 가야를 건국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이가 바로 수로왕이다.
불모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김해가 뻗어가는 듯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기록상으로 본다면 최초로 외국인과 결혼하여 문명을 만들어간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있었다. 장유화상은 김해시에 가장 큰 신도시이기도 한 장유동의 이름처럼 새로운 길을 개척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