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마지막을 본 덕주공주의 이름에 걸맞은 제천 덕주산
경주 최 씨의 시조가 된 최치원은 최 씨라는 성을 스스로가 쓴 최초의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신라가 국운을 다했음을 알았던 사람이다. 후백제 시기에 전국을 떠돌며 살았던 최치원은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두었다. 그렇게 신라가 저물어갈 때 견훤은 고려와 연결되었던 신라의 경주를 공격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면서 후삼국중에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다. 당시 경순왕은 여력이 남지 않은 신라에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제천의 덕주산성을 찾은 것은 신라말기에 이곳에 터를 잡은 덕주공주와 마의 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보기 위해서였다. 경순왕은 결정을 내리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내주었다. 덕주공주는 덕주산성이 자리한 이곳에 절을 짓고 마애불을 조영 했다.
덕주산성은 상당히 짜임새가 있는 규모로 만들어진 성이다. 성의 주변으로는 풍경이 찬란한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다. 덕주산성 바로 옆에는 학소대가 있는데 월악산 깊은 골에 흘러 내려오는 물이 감도는 곳으로 덕주산성 동문과 학소대 위 망월대가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에는 나라도 사라지게 된다. 쉬어가는 안식처로 여기에 앉아서 신라 천년사직의 시간을 회상해 본다. 덕주산성은 국내산성 중 특이한 시설을 갖췄는데 산등성이와 계곡을 휘감아 4겹으로 둘러싼 대규모의 산성이다.
고려는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경주 지역을 식읍으로 주면서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했지만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는 경주를 떠나 이곳에 머물렀다.
성안 덕주사와 마애불이 있는 뒤쪽은 암봉 절벽이 병풍을 둘렀고 그 양쪽 900m 고지에 내성은 장장 4km의 성벽으로 이어져 있다.
동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성벽이 산을 타고 넘는 제2곽의 차단성으로 성벽안쪽은 가파른 산지형 때문에 계단식으로 쌓았다. 신라는 월악산에 산성을 쌓고 산신에게 국태민안을 빌었다고 한다. 고려는 몽고가 쳐들어오자 노약한 백성들을 이곳으로 피신시켜 란을 피하기도 했다.
소백산과 속리산 중간에 자리 잡은 월악산 덕주산성은 국내 산성중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월악산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품고 있어서 여행지로 방문해 볼 만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의 명산이라고 부르는 산들은 물이 항상 마르지가 않는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기도 하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대몽항쟁의 공간이기도 했던 덕주산성은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충성하고 임진왜란 때에도 역할을 하던 곳이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명성황후와도 관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덕주산성은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산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덕주사를 감상 중성 (제2관, 일명 동문 주변)과 그 외곽으로 하성(제3곽)이 있으며,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등 네 겹으로 이루어진 산성이다.
아름다운 산, 신령스러운 봉우리, 나라의 큰스님, 나라의 중요한 제사, 딸이 떠오르는 환상적인 모습등이 어우러진 월악산자락의 덕주산성은 고려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월형산이라고 불리다가 와락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경순왕에게 신라를 받은 왕건이 도읍을 정할 때 개성의 송악산과 경쟁하다가 개성으로 도읍이 확정되면서 도읍의 꿈이 와락 무너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