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을 기리며 세운 작은 함안 덕연서원에 모셔진 신재 주세붕
최고의 교육기관은 어떤 조건과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 과거에도 명문으로 알려진 교육기관은 있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교육기관이 향교와 같은 곳이었다면 그 지역에서 누군가의 선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특별한 교육기관은 서원과 같은 곳이었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필요하고 그 제도를 올바르게 운영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게 국학이라는 제도가 생겨났는데 지방에도 그런 제도를 본받아 만들어졌던 곳이 서원이다.
해는 저물었지만 최초의 서원을 세웠다고 알려진 신재 주세봉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덕연서원이 있는 곳을 방문해 보았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기념하여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는데 그 후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 받았다.
함안군에 자리한 덕연서원이라는 서원은 신재 주세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덕연서원은 선조 24년(1591)에 ‘동림서원’으로 세웠으나, 현종 원년(1660)에 칠원현 남고에 ‘남고서원’으로 새로 세웠다. 숙종 2년(1676)에는 ‘덕연’이란 이름을 나라로부터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덕연서원의 주변에는 마을분들의 집들이 둘러싸고 있다.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는 곳에 자리한 덕연서원은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1964년에 다시 세우게 된다.
신재 주세붕은 관력에서 보듯이 내직은 대체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을 통한 교화에 힘썼던 사람이다. 덕연서원 안에 있는 건물로는 강당, 존덕사, 덕연별사가 있으며 교육 공간인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배움이라는 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교육제도도 수없이 변화를 해왔다. 시대가 변하면서 필요한 교육도 달라지게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지를 배우는 것이 아닐까.
덕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문 이름은 여임문이다. 같은 곳으로 임하는 문이라는 의미인데 신재 주세붕이 가려고 했던 길을 따르는 의미였을까. 주세붕은 풍기에서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고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하였다.
존덕사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존덕사 오른쪽에 위치한 덕연별사에는 삼칠선현(三漆先賢) 다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공자라는 사람은 오십이 넘어서야 겨우 정치에 나섰지만 육십이라는 나이에도 타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공자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70이 넘어서 자신의 삶을 말할 때 자신의 길은 하나로 꿰어 있다고 말하였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서 공자라는 사람의 뒤를 따라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신재 주세붕도 있었으며 그를 기린 덕연서원도 세워졌다.
일관성 있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도 지치지 않을 나이가 언제일까. 아무리 늦은 시간이었어도 갔어야 할 곳을 가보는 것은 적어도 그런 노력이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기를 생각하면서 발길을 했던 것이 아닐까. 최초의 서원을 세웠던 신재 주세붕은 인생에서 꼭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