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노성의 노성궐리사, 명재고택, 노성향교 속의 명분과 삶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할까. 사람이 어떤 행동이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명분이다. 명분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이나 그 사회의 도덕성 등을 반영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논산 노성이라는 지역에 가면 윤증의 고택이 잘 보존이 되고 있다. 열린 공간의 윤증고택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가을이 모두 지나갔는지 롱패딩을 입고 다녀야 추위를 덜 느낄 수가 있다. 논산 노성이라는 지역에는 성리학의 숨결이 남아 있는 노성궐리사, 명재고택, 노성향교등이 남아 있다.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인 궐리촌에서 이름을 따온 노성궐리사는 중국에서 가져온 공자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다. 윤증의 아버지였던 윤선거를 비판했던 우암 송시열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세웠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2002년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곡부)에서 보내온 높이 2m의 공자상이 눈에 뜨인다.
한반도의 중심 뼈대를 이룬 백두대간에서 이어져 내려온 용맥(龍脈·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이 좌우로 요동치고 상하로 기복을 하면서 전진을 거듭하다가 금강정맥을 탄생시켰으며, 이 정맥이 솟구치기를 반복하면서 뻗어나가 금남기맥을 만드는데 그 기세가 이곳에서 머무른다.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는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가 성문을 지키다 점령당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삶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에 윤증의 스승이기도 했던 송시열은 홀로 살아서 나온 윤선거를 경멸하고 멀리하였다. 그런 아버지와의 관계로 인해 스승과 결별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삶이 아들에게로 이어졌던 것일까. 윤증은 관직 요청이 수없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고택의 주산인 노성산 자락은 노적봉(露積峯·곡식을 쌓은 듯한 형상의 산)으로 재물이 넉넉함을 암시하고, 고택으로 불어닥치는 뒤쪽 바람도 막으면서 지속적으로 고택에 생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옛날 집들은 기와집이 아니면 이렇게 1년에 한 번씩은 볏짚을 활용해서 지붕을 새로 갈아야 했다. 필자가 방문했던 12월의 맑은 날에는 이 지붕을 교체하는 작업을 한참 진행하고 있었다. 대개의 시간을 거실에서 보내므로 비록 방의 기운이 보통이라 하더라도 거실에서 생기가 솟으면 길택(吉宅)이라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잘 꾸미는 것인 자신에게도 혹은 주변사람이나 후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 명재 고택에는 ‘이은시사(離隱時舍)’란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는데 ‘떠돌다가 때를 알고 은거하는 집’이란 뜻이다.
윤증고택의 바로 옆에는 노성향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평소에는 닫혀 있었는데 올해부터 상시로 개방을 해놓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수없이 이곳을 왔는데 열려 있는 노성향교는 처음 방문해 본다.
사실 이곳의 윤증고택은 1709년 조선 중기 학자 명재 윤증(1629∼1714)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윤증은 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초가집에 살았으며, 이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고 한다.
고요히 보내기에 좋은 12월이다. 12월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 중에 있다. 2026년을 준비하는 시간이 분명한데 올해는 그냥 바빴던 한 해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학생들이 명재 윤증고택을 방문해서 이곳에서 기거하시는 분의 설명을 듣고 있다. 윤선거와 윤증은 아버지와 아들관계이기도 했지만 명분에 따라 행동했고 때론 실리적으로 선택했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윤증의 삶 속에는 명확한 기준이 세우며 살았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