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팽령이 세운 옥천 양신정과 전팽령과 전식, 전유를 모신 목담영당
옥천 전 씨는 옥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전섭(全聶)의 27 세손 전유(全侑)가 고려 충숙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밀직부사(密直府使)‧판도판서(版圖判書)‧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다.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藜), 오간(烏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 사람과 함께 백제 개국의 공을 세웠다고 한다.
오래간만에 옥천의 금암리라는 지역을 방문해 보았다. 목금의 금자와 용암의 암자를 따서 금암리가 되었다. 금암리의 대표적인 문화재는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과 그 앞에 목담영당이 있다.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람들의 이야기에게 가진 치유의 온기를 불어넣으며 때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가질 수가 있다. 옥천 전 씨의 흔적들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옥천 목담서원은 1765년에 유림과 옥천전 씨의 후손들이 조선 중기의 문신 송정 전팽령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세워져 운영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것을 1936년 복원하면서 영당만을 세우고 전팽령, 전식, 전유 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현재는 청주박물관에서 위탁관리하고 있고 대신 모사본이 봉안되어 있다.
매년 3월 중정일에 옥천 목담영당에는 춘향제를 올리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민도리집이다. 측면 1칸 반 중 전면 반칸은 툇마루를 두고 후면 1칸은 통칸으로 두어서 영정을 봉안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두었다.
목담영당의 뒤편에는 옥천의 양신정이 자리하고 있다. 양신정은 학문이나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수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절차탁마에 어울리는 공간으로 전팽령이 벼슬을 그만두고 옥천으로 돌아와서 독서와 글을 가르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두었다고 한다.
세워진 후에 병화로 불타고 무너져 없어지기도 했다가 1828년 순조 28년에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목조 기와집으로 한 칸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
자연의 가치를 알고 벗하여 옥천의 풍경을 즐기며 편히 생활했던 전팽령은 출사 하여 청백리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벼슬과 봉록을 맡는 것은 뜬구름처럼 여겼다고 한다.
조용한 공간에서 쉼을 가져본다. 현대 사회가 시장의 교환 원칙에 지적 박게 되면 인간의 가치도 경제적 교환 가치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곳에서 머물르면서 살았던 전팽령은 삶의 본질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모든 나뭇잎을 떨구고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남아 있지만 나를 되찾는 여정 속에서 이곳도 의미가 있었다. 심리학자인 융은 인간은 자아로 살아가지만, 진정한 삶은 자아 너머에 있다고 말했었다. 모두가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한 여행을 해보기에 좋은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