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에서의 하루

아침과 점심 사이에서 먹거리와 떠오른 이야기들

소설이라는 것은 더욱더 현실적이어서 사람에게 호소력이 있다. 현실은 사건을 보여주지만, 소설은 그 사건 속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보여준다. 뉴스는 결과를 말하지만, 소설은 그 과정에서 망설였던 순간을 붙잡는다. 기록은 외형을 남기지만, 이야기는 감정을 남긴다.세부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한국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공기는 이미 따뜻하고, 창문을 열면 습기가 먼저 인사를 건네지만 낯선 곳이어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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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마친 뒤에는 특별한 일정 없이 거리를 걸어본다. 세부의 도로는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자유로워서 좋다. 트라이시클과 오토바이, 그리고 익숙한 프랜차이즈 간판이 묘하게 섞여 있다. 관광객과 현지인의 동선이 겹치는 순간, 여행자는 늘 관찰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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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상관없이 필리핀의 맥주 레드호스를 마시는 것은 마치 진한 커피 한 잔과 비슷하다. 세부에서 맛본 망고의 달콤함은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분명히 달랐고, 맥주는 강했지만 묘하게 부드러웠다. 낯선 장소에서의 식사는 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 익숙하지 않기에 더 또렷하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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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의 아침 식사는 늘 기대를 품게 만다. 호텔이든 로컬 식당이든, 그 지역의 하루는 식탁에서부터 시작되는 듯 하다. 이날 아침은 비교적 단순했다. 고기와 밥 그리고 적당한 채소가 들어간 식사를 먼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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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현지 식당에서 해결했다. 짭조름한 오징어로 만들어진 음식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그런 감성이 담겼으면서도 짭쪼름함이 있. 시원한 맥주 한 잔. 테이블 옆에서는 현지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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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아이템은 거창한 사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에서 더 많이 태어난다. 예를 들면 이런 설정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사실은 서로의 과거와 얽혀 있는 이야기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설정

자신의 미래에 살게될 스스로가 다시 찾아와서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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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의 바다는 유난히 푸르지만, 그 아래에는 늘 보이지 않는 깊이가 있었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풍경은 밝고 단순해 보여도, 그 안에는 각자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길을 걷다 문득 이런 문장이 떠오른다.

“햇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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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낯선 언어지만 웃음의 톤은 비슷하다. 여행은 언어보다 분위기를 먼저 이해하게 만드는 시간 같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특별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쇼핑몰 안을 천천히 걸어도 보고, 바닷가 근처로 나가 바람을 맞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붙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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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햇빛은 강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표정도, 거리의 색감도 더 분명해 보인다. 소설 속 인물도 이런 배경 위에 세워두면 더 선명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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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의 하루는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충분히 이야기가 된다. 아침과 점심 사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시간 속에서 오히려 가장 많은 생각이 태어나기도 한다. 어쩌면 소설은 책상 위가 아니라 이렇게 걷는 동안 완성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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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간다. 관광지의 화려함보다, 그 사이에서 떠오른 작은 생각들이 더 오래 남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한 번뿐인 삶을 산다. 그러나 소설은 한 사람에게 여러 번의 삶을 허락한다. 한 번도 가지 못한 도시를 걷게 하고 겪지 않아도 될 상실을 미리 경험하게 하며 타인의 선택을 이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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