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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istan Sep 15. 2021

02. 사람인척 하는 원숭이 2

남이 한 일도 자기가 한 일이라는 차장에 관하여

0.

이기적인 차장이다.

본인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노리는 게 아니라 일 안 하고 일한 척하는 그는 이기적이다.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한다, 남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게 아니라 자기가 차렸다고 우긴다, 어쨌거나 머리는 있어서 팀장에게 밑 보이지 않기 위해서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어필하는데, 그 일이라는 것이 남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일인 것처럼 포장하는 게 유일하다. 이 정도면 마케터가 아니라 포장해서 전달하는 Fulfillment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호랑이 팀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차이점이 있다면 호랑이 팀장은 자기가 일을 안 하지만 자기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원숭이 차장은 본인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어서, 남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일이라고 하는 점이다. 대리 사원급에서는 남이 한 일을 당겨서 자기가 한 척하기 쉽지 않은 위치지만 차장쯤 되면 밑에 사원대리과장이 있으니 충분히 사용 가능한 스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1.

일하지 않고 일하는 흉내를 낸다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문장일 것 같아 한번만 짚고 가자. 제발 일 좀 하자!!! 자기가 맡은 일을 그냥 하면 되는데 왜 안 해서 이 사단을 내는가? 그렇다면 말 나온 김에 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이를 공유하고 역할을 나누고 예산을 집행하고 계획을 실행하고 정산하고 결과를 내고 잘 됐으면 회식하고 망했으면 피드백하고 뭐 이런 거 아닌가? (거창한 걸 기대하는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책 보다가 퇴근하기 전에 '아까 아침에 팀장님이 얘기한 거 어떻게 되고 있어?' 스을쩍 물어보고 퇴근 직전에 팀장님한테 'ㅇㅇㅇㅇ 사항 진행 상황' 따위의 메일을 쓰는 게 일이 아니라는 거다. 팀장님이 지한테 시킨 기획안을 지 밑에 대리한테 '팀장님이 지시한 그 기획안 작성해서 나한테 먼저 줘봐'라고 해서 받아다가 오탈자와 제목만 바꿔서 팀장님한테 지 이름으로 메일 보내지 말라는 거다. 그런 메일 보낼 때 ㅇㅇ대리가 초안 작성했고 제가 조금 수정했습니다라는 코멘트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 작성한 사람을 CC 정도는 해서 윗사람한테 메일 보내야 되지 않나?


본 짤은 본문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2.

(가끔) 일을 하면 생색을 낸다

그래도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차장이니 부득이하게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전국 지점에 지점 이벤트 가이드를 내리거나, 여러 팀장에게 ㅇㅇ 업무 협조 메일 등을 보내는 등이다. (물론 메일에 첨부파일로 전달되는 구체적인 지점 가이드, 업무 협조 기획안은 밑에 대리가 쓴 것이고, 그 대리는 CC가 빠져있다) 아마 일을 하고 있다고 생색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런 메일은 꼭 자기가 챙겨서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메일이 졸라 길다는 거다. 진짜 졸라 길다. '이용 고객에게 음료수 1개 증정하는 이벤트 협조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이 전부인데, 오늘의 날씨를 기반으로 한 문학적인 인사로 시작, 자기가 이 음료수를 어떻게 얻어왔고, 고객들은 정말 행복해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협조 바람. 이따위다. 이런 내용을 23인치 PC 모니터 기준으로 3크롤 이상을 작성하면 현장에서 짬짬이 메일 확인하는 담당자 입장에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더욱이 여기서 협조 바람.은 필자가 그 긴 메일을 요약하기 위해서 쓴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이메일의 마침 문구다. 


이 협조 바람이라는 문구가 굉장히 중요하다. 자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면 원숭이 드림.으로 끝나는 이메일이 아랫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여지없이 꼭 협조 바람.으로 끝난다는 거다. 나만 이 문구가 불쾌한가… 내가 예민한 건가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친한 지점 사람한테 사내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원숭이 차장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보통 이 문장은 '이 인간 뭔가 이상한데 어떤 인간이야?'라는 문장과 동일하다) "그 사람 메일만 보면 왜 이렇게 불쾌하지?” 보통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응. 사람 아니고 사람 흉내내는 원숭이야." 사람 마음 다 똑같다.


3.

불쾌하다.

잠깐만 유식한 척 해보자.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개념이 있다. 로봇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수록 오히려 불쾌감이 증가한다는 개념으로 최근에는 영화 CGI 그래픽을 두고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콘텐츠 제작사에서는 인간과 거의 유사하게 표현해낼 CGI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눈을 크게 하거나 머리를 크게 하거나 하는 조치를 한다. 원숭이 차장이 불쾌 지점도 이 같은 개념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일하는 척! 하고, 남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척! 하니깐 불쾌한 거다. 우선은 내가 한 일인데 지가 한 일이라고 하는 상황을 당한 사람이 불쾌하고, 협조 바람이라는 메일을 받은 아래 직원이 불쾌하고, 아래에 있지도 않은데 지점에 있다고 하대 당하는 지점 사람이 불쾌하고, 그 불쾌했던 지점 사람이 본사 팀장이 되어 콘텐츠 마케팅 팀장한테 불쾌했던 기억을 전하고,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불쾌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 원숭이가 그렇게 공들였던 윗사람도 아래에서 올라온 다양한 불쾌함 들을 수집하게 되어 그는 불쾌한 사람이 된다. (에라이 차라리 일을 그냥 하지 마라!)


 

위키에서 긁어 온 건데 뭔가 이 브런치가 좀 더 유식해 보이는 효과를 의도했음


4.

일을 잘 못 배웠다.

결론적으로 원숭이 차장은 일을 잘 못 배웠다. 기본 성향은 내향적인데 정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동물의 왕이 되었다. (읭? 시작은 사람인데?) 조직 생활이 기본적으로 윗사람한테 잘 보이고 아랫사람한테 소홀할 수도 있다고 하나, 윗사람만 존대하고 아랫사람은 하대하는 것이 통용된다고 생각한다면 아니올시다입니다. 원숭이 차장이 사원대리과장일 때 도대체 어떤 상급자를 만나고 어떤 사회생활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충실하게 행하고 있는 차장의 역할상은 본인이 정립한 것이고, 그 역할상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는 본인이 책임 질 문제다. 그렇다. 인생사 남 탓할 거 하나도 없다. 


앞의 에피소드에 제기한 문제, 1. 왜 원숭이 차장은 남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일로 포장하여 보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2. 그녀는 왜 계속 지각을 하는가? 3. 왜 팀장만 없으면 업무시간에 책을 읽는가? (문학책) 이에 대한 대답은 시시하지만 간단하다. 그게 차장쯤 되면 해도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번 = 내가 잘 조율하고 있다. 2번 = 차장쯤 되면 근퇴는 알아서. 3번 = 자기 계발.  뭐 정도 수준이다. 그냥 차장쯤 되면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관대한 차장"상=Image"에 본인이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냥 일을 잘 못 배웠다. 이쯤되면 자기가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남이 한 일을 자기가 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불손한 컨셉이 일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겠다. 


5.

반품

그래서 회사는 원숭이 차장을 반품했다. 회사라는 것이 참 알다가도 모를 유기체 같다. 회사는 건물도 아니고 숫자도 아닌,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유기체라 계속 쳐다보고 있을 때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항상 듣고 말하고 움직인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느끼기 힘들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콘텐츠 마케팅 팀이 해체되고 원숭이 차장은 다른 팀으로 가게 되었는데, 새로 옮긴 팀의 팀장은 그를 팀 내 외딴섬으로 보냈다. 명색이 차장이면 팀 내에서도 특정 파트를 맡아서 운영할 법도 한데, 그냥 그를 혼자 두어 독립된 업무를 맡겼다. 뒤늦게 해당 팀장한테 들은 외딴섬의 원숭이의 이유는 간단했다. “계속 남이 한일 지가 했다고 하니까…” 참 이렇게 둔해 보이는 조직도 사실 다 알고 있구나 싶었다. (아니 진즉에 알았는데 왜 이전에는 가만히 둔 거지?) 


어쨌든 회사는 코로나로 어려워졌고 구조조정이 칼날이 매서운 그 시기에 원숭이는 섬에서 나와 원래 왔던 회사(aka. 정글)로 돌아갔다. 가기 전에 원숭이는 또 추리고 또 추려서 몇몇 잘 보여야 할 윗사람들 한테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다. '(전략).... 여기 있는 동안 잘 배우고 돌아갑니다. 원숭이 드림"  잘 배우고 간다? 계속 업무시간에 책보더니 여기가 학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미 떠나간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전한다. '회사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 증명하는 곳이란다' '너는 전학 간 게 아니라 반품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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