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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istan Sep 23. 2021

03. 무례한 소한 마리1

말의 태도는공손 하지만 내용은 무례한 차장에 관하여

소 유형 특징

장점: 타고난 성품이 유순함. 말을 곱게 함. 묵묵히 정해진 방향으로 일을 함. 둥글둥글해서 인상이 좋음 / 단점: 스트레스 관리 능력이 부족함. 말은 곱지만 내용은 무례함. 잘 못된 방향인데도 계속 그쪽으로 일을 함. 일도 둥글둥글하게 해서 허술함.


0.

이런 유형이 있다. 둥글둥글한 외모에 걸맞게 말투도 둥글둥글하여 기본적으로 공손한 태도가 장착된 사람. 딱히 구김도 없고 모난 구석이 없어서 만약에 갓물주 아들로 태어났으면 검소하게 국산 소형차 타고 다니면서 웃는 얼굴로 세입자를 대하며 유유자적 살아갈 법한 그런 사람이 소 차장이다. 문제는 그런 소가 건물주 아버지는 못 만나고 호랑이를 만났다는 거다! 풀 뜯어먹으며 초원에서 살아야 할 소 차장은 호랑이 팀장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하루에 1-2시간씩 모진 포효를 받아내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소가 갑자기 풀 뜯어먹다가 말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타고난 공손한 태도는 유지한 체로 말의 내용이 점점 무례해져 가는 소차장에 대한 이야기다


1.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고기 먹는 소 차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첫인상이다.


그는 원래 법무팀의 PR 담당자였으나 기능상 마케팅이랑 함께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명분 하에 콘텐츠 마케팅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 그를 호랑이 팀장은 지점 마케팅 담당자로 임명했다. (왜 그런지는 호랑이 팀장편 참고) 타고난 천성이 공손하여 기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 천직이다 싶었으나 역량 확대라는 호랑이 팀장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순순히 지점 마케팅을 맡겠다고 한 것부터 실책 이리라. (그리고 지점 이벤트 파트에는 뱀 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은 무난한 그의 첫인상처럼 순탄하게 일이 진행되나 싶었으나 그가 우연히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호랑이 팀장님,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글로 보게 되는 저 문장은 뭐 하나 이상할 게 없고 공손한 문장이지만, 이 말의 타이밍과 대상으로 인해 이 문장은 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사라예보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이 되고 말았다.


격조 높은 참고 자료


2.

정말 별일 아니었다. 연중에도 몇 번씩 있는 새로운 점포 오픈 이벤트 기획서를 호랑이 팀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였고, 내용도 기존에 했던 이벤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난한 계획이었다. 호랑이 팀장도 무난한 피드백을 했다.


“소 차장님, 계획 잘 검토해봤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가보면 어떨까요? USP를 잡아서 차별화했으면 좋겠는데, 예를 들면 주변 상가와 컨센서스를 이뤄서 코-프로모션으로 방향을 잡는다든지, 아니면 우리만의 이니셔티브를 가져갈 수 있는 방향이라든지…”


호랑이 팀장의 보그체 의견은 보통은 그 자리에서는 그러려니 하고 이후에 살짝 바꿔서 다시 가져가면 해결되는데, 소차장은 궁서체로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당연히 회의라는 것 자체가 이견을 조율하는 자리이지만,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일절 겸양 없이 내뱉게 되면 적어도 동방예의지국에서는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특히나 상대가 자격지심이 가득한 팀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문제는 적어도 저 문장을 내뱉고 나서는 어떠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소차장은 "그냥 그대로 가시죠?"라고 우기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렇다. 그냥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우리 배달의 민족은 지는 싸움에는 나가도 명분 없는 싸움에는 나서지 않는 민족인데 그냥 우기기 시작하면서 일이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호랑이 팀장은 절대 본인의 실력 없음이 들통 나서는 안 되는 성격이었고,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오타와 줄 바꿈, 폰트와 PPT 파일의 용량이 커서 가독성이 떨어진다(읭?) '왜 용량도 적고 가독성도 뛰어난 PDF를 사용해서 윗사람을 배려하는 실력이 없냐'라는 말에 소차장이 극적으로 수긍함으로써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3.

여기서 소차장의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건 바로 측은지심 유발 능력이다. 구타유발자와 비슷한 개념의 측은지심 유발력은 허술하게 준비한 기획안을 반복적으로 주장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고 화를 내게 만든 다음 처량한 뒷모습만을 남기고 자리를 뜨는 전략이다. 그러고 나면 화를 낸 당사자는 본인 스스로 그 정도가 과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다음 미팅에서는 적당히 수정된 흔적만 있으면 진행을 허락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 험악한 상황에서도 말은 곱게 하는 소 차장의 장점이 십분 발휘되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물론 매번 성공하는 전략은 아니다.


그래서 동반하게 되는 한 가지 현상은 소 차장 책상에는 항상 커피가 2~3개씩 놓여 있다는 것이다. 팀장과 미팅을 하든, 과장-대리-사원 심지어는 타 팀 인턴이랑 미팅을 하고 돌아와도 소 차장 책상 위에는 항상 갓 내린 커피가 놓여 있었다. 이는 화를낸 상대방이 사과의 표시로 보통 커피를 사주게 되어 그런 것인데, 측은지심 유발 능력은 허술한 기획서도 미팅 2번만 진행하면 일도 진행되고 커피도 생기는 일석이조의 전략이라고 할 수가 있다.


4.

그렇게 약 3개월이 지나갔다. 아무리 소 차장이라고 해도 이렇게 반복된 갈등은 스트레스가 되어 점점 쌓였고, 위에서 내려오는 스트레스를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 그는 아래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특히 호랑이 팀장에게 1~2시간 깨지고 난 이후에는 상기된 얼굴을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고 나면 꼭 자기보다 약한(직급이 낮은. 이 아니다) 타 직원에게 곤조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곤조도 말투는 공손했는데 콘텐츠는 무례했다. 얘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보세요? 어 뱀 대리 주말에 쉬는데 미안, 내가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그 우리 새로 오픈하는 점포 옆에 있는 매장이 뭐였지? 아 맞다 올리브 영, 응 고마워! 주말 잘 쉬고!”


이따위 전화를 평일 밤늦은 시간에, 주말 오후에, 크리스마스이브에, 자기가 그냥 궁금한 시간에 막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네이버 지도만 검색해봐도 바로 알 수 있는걸 왜 이 시간에 전화해서 왜 물어보는 걸까. 혹시 옆에 팀장님이 있는데 빨리 확인하라고 해서 바로 전화한 걸까? 생각도 했으나 이런 행태가 반복되자 팀원들은 적어도 퇴근 이후에는 그의 전화를 아무도 안 받기 시작했다. 그래도 전화를 일부러 무시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다음날 출근 하자마자 왜 전화했는지 물어보면 한번도 빠짐없이 쓸데없는 궁금함을 확인하기 위한 전화였음을 확인하게되어 허탈하게되고, 이후에는 업무 중에 전화를 해도 아무도 받지 않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아... 맨날 육식동물만 쓰다 보니 화가 나서 초식동물 편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불쌍해서 더 못 쓰겠다.  심리의 근원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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