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병조림
언젠가부터 어머니께서 아주 가끔 해서 안겨주시던 복숭아 병조림.
어렸을 때의 추억의 음식 같은 건 아니고,
아마 나와 내 동생 두 먹깨비가 집에서 각각 독립하고
더 이상 아버지의 먹성이 예전 같지 않아진 시점이 아닐까 싶었다.
못해도 치킨 두세 마리는 시켜야 먹었다 할 수 있었던 먹깨비들 사이에서
작은 요정 같은 우리 어머니였는데.
어느 날부터 집에 쌓이는 과일을 어떻게 버리지 않고 처리할까 하다가 생각해 내신 게
이 병조림이 아니었을까- 복숭아 철이 좀 지난 어느 늦가을 밤,
냉장고에서 꺼내 냠- 먹으면서 생각하곤 했었다.
사실 너무 바쁜 삶을 사는 나로서는 그마저도 본가에 받으러 가는 일이 드물기도 하고
혼자 사는 살림에 과일은- 사기도 비싸거니와 버리면 몹시 아까운 것이 되어서
그저 늘 마트 입구에서 쓱- 지나가는 곳에 놓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남자친구는 퍽 부지런히도 우리 집에 과일을 사다 날랐다.
어느 날은 초록초록한 샤인 머스켓을 박스째 들고 나타났는데,
그때서야 나는 처음 샤인 머스켓을 맛볼 수 있었고 입안이 초록으로 물드는 느낌에 히힛, 하고 웃었다.
그날, 그 남자는 그 사람보다 15살이나 많은 나를 보고 무척이나 귀엽다고 느꼈단다.
히힛, 이라니. 커다란 포도알을 물고 히힛- 하고 웃는 내가 너무 귀여웠노라고 두고두고 이야기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그가 계절마다 바뀌는 과일을 퍽이나 부지런히 사다 나른 건.
점점 과일 값이 하늘을 찌르는 순간에도 그는 매주 잊지 않고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었다.
하루는 주먹만 한 붉고 커다란 딸기를 강남 집에서부터 들고 나타나기도 했고
또 다른 하루는 반으로 쪼개 쪽 빨아먹으면 가을을 가득 머금을 수 있는 반시를,
더운 여름에는 절대 혼자라면 시도도 못해볼 커다랗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박을
땀을 뻘뻘 흘려가며 사들고 나타나곤 했다.
개인적으로 딱딱이보단 말랑이 복숭아를 참 좋아하는데,
올해는 어쩐 일인지 말랑이 복숭아를 만나기가 퍽 어려웠다.
그 사람 역시 퍽이나 안타까워하며 말만 해요, 어디서든 사줄게!라고 하곤
고쟁이 속 쌈짓돈을 움켜쥐고 손주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할매마냥
여러 곳을 헤매고 다녔지만 결국 만난 건 딱딱이 복숭아였고
다 먹지 못해 어찌할까 하다가,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복숭아 병조림이 생각나
그에게도 좀 밤 간식으로 줄 겸 만들게 되었다.
그날에는 그게 그가 사줄 수 있는 마지막 과일이 될 거라곤
그도, 그리고 나도 생각지 못했다.
사실 말이 거창하지, 별 거 없다는 건 만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설탕 + 레몬즙 같은 걸 섞어도 좋지만, 요즘엔 복숭아맛 제로 음료 같은 것이 있어서
껍질을 씻어 벗겨내고 툭툭 잘라낸 복숭아 위에 한 병을 따서 부어주곤
설탕을 취향에 맞게 적절히 넣어주고 끓여주면 끝이다.
단 걸 별로 안 좋아한대도, 여기에 설탕을 안 넣는 건 안 된다.
설탕이란 건 꼭 단 맛뿐만 아니라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보존제 역할도 하는 거니까.
정해진 시간도 없다. 백도라면 살짝 투명해지는구나- 싶을 때까지
위에 올라온 거품을 살살 걷어내면서 끓이면 된다.
그 사이, 열탕 소독한 유리병을 준비해 두면 더 편하다.
아직 병이 뜨거울 때 뜨거운 황도를 국자로 조심스럽게 떠서
차근차근 병 안에 넣어주고 끓였던 국물을 부어준 뒤
병 입구를 꽉 닫고는 거꾸로 세워서 어느 정도 식을 때까지 두면 된다.
그다음엔 냉장고에 넣어두고 과일이 그리운, 공기가 차가운 밤에 한 두 조각 꺼내 먹을 수 있다.
복숭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그 사람도
부드럽게 넘어가는 게 밤에 먹기 적당한 간식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긴, 그 사람은 내가 무엇을 해주든 다 맛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헤어지고 난 뒤 떠올려 보니, 함께 할 때도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참 고맙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비교적 간단하다.
서로 감정이 끝난 것이라기 보단, 우리 사이엔 너무 큰 벽들이 많았다.
아직 너무 어린아이 같은 그 사람을 모두 감당해 내기엔 나는 너무 벅찼고 바빴다.
그는 사랑이라는 말로 내게 꽤나 많은 부분을 의지했고 의존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게 너무 큰 무게로 다가왔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와 상황도 바뀌었고 환경도 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세월을 타고 흘러갔고 이젠 이별을 할 순간이었기에 이별한 것뿐.
여름, 겨울, 봄, 그리고 또 다른 여름을 함께 하고 가을 앞자락에서
우린 헤어졌다.
알지 못한다.
어느 날엔가 다시 마주하여 다시 시작하게 될지,
혹은 서로의 연인이 있음을 알리며 멋쩍게 안부를 묻게 될지.
그는 자신이 바뀌겠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지, 나에게 던지는 애원인지 모를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리고 언제고 자신이 그립거든 돌아와도 좋으니, 자신을 잊지 말라고도 했다.
거기까진 생각하기 어렵고,
그저 그 사람이 너무 오래도록 아프지 않길 바라고만 있다.
때마다 향긋한 과일을 양팔 가득 품고 나타나던 그 상냥한 사람이
너무 오래도록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