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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경 Mar 11. 2022

(동화) 고양이 선생 특별 레슨- '봄'

고양고양님과 도토리의 시간

고양이 선생 특별 레슨 글놀이 시간
3월 2주 '봄'


"봄은 깨뜨려야 시작이다"

누가 그랬냐고?

바로 나야 나!

눈이 있어도 어둠의 시간을 보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들을 위해 좀 수고스럽지만 나 고양고양님이 직접 '봄'을 알려주려고 해. 고양이 선생의 교양이 어느 정도 인지 궁금하다면 잘 들어 놓는 게 좋을걸?


고양이로서는 봄의 시작도 끝도 특별히 정해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꿈틀대는 마당의 생명이 그때부터 시작되니 그걸 눈으로 보라고 '봄!'이라고 인간들이 부르나 보다~ 우리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

인간들은 "손!" 하고 나보고 가끔 멍청한 주문을 할 때가 있거든?

하~ 그건 덩치만 큰 옆집 멍멍개 보리나 하는 거지, 나같이 도도한 고양고양님에게 그런 주문을 하다니! 인간은 참 어리석어.


앗, 멍멍 때문에 잠시 흥분했네?

흠흠.. 인간들이 모르는 세상의 반을 알고 있는 고양고양님이 이렇게 일부러 나서서 봄을 설명해 주고 있으니, 다시 잘 들어봐~

나? 고양고양님.- '치르치르'라고 불러도 된다.


쿨쿨 자는 둔감한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난 어느 새벽 씨앗의 소리를 들었어.

겨우내 흰 눈과 얼음 덕분에 딱딱한 껍질 속에서 겨울잠을 푹 자고 난 후, 우리 고양이님들이 일광욕을 슬슬 즐기기 시작할 때쯤, 씨앗들은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하얀 발을 살짝 내밀어 흙 속으로 들어가려 움직이고 있었어. 눈감고 모른 척하고는 있었지만 고양이들은 늘 다 보고 있지.


흙 속이 와글와글 들썩거리고 땅이 쩍쩍 갈라지며 움직이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인간보다 빨리 알아채는 '봄'의 느낌이야.


봄은 나에게 놀이가 슬슬 시작된다는 신호를 주고 있어. 난 분홍 젤리로 땅 위로 올라오는 것들을 꾹 눌러보기도 하고, 뭐가 들었나 들쳐보기도 하지. 아주 얌전히 말이야.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정원을 마구 파헤친다고 착각하지 모니? 그건 두더지나 하는 일이지. 고양고양님은 교양이 있다고!

앗, 인간 때문에 또 흥분했네~


사실 놀이의 시작은 그전부터였어.

어릴 적 난 동생 고양이들이랑 가을 언덕 위에서 도토리를 굴리면서 노는 걸 좋아했어. 동그란 도토리는 이쪽저쪽 잘도 구르더라. 도대체가 씨앗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대한 몸뚱이로 덱데굴 굴러다니는 도토리는 우습기까지 했어. 딱딱한 감옥 속에 자기가 갇힌 줄도 모르고 어딘가로 막 굴러 내려가는 모습 말이야. 그러다 돌부리에 탁 걸릴 때, 자기가 민들레 홀씨나 된 듯이 날다 모자가 휙 벗겨져 쑥스러운 민머리를 보이고는 씩 웃는 해맑은 캐릭터야...


게다가 쓸데없이 너무 반질반질 반짝거려서 다람쥐들에게 금방 잡혀 버리곤 하는 멍청이들 같았어. 그렇지만 더 모자란 건 다람쥐들이야. 그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숨겨둔 나무 밑 저장고를 가끔 까먹을 때가 있어. 그 건망증 덕분에 많은 도토리들이 살아남아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니 어이없지만 도토리도 기억도 둘 다 잘 까먹는 다람쥐들에게 가끔 고마울 때도 있다 생각도 들곤 해.


출처 픽사 베이


그런데 분명히 내가 언덕쯤에서 굴리던 도토리가 우리 집 마당에도 굴러다니더라. 흠.. 아이들 주머니 속으로 여행하다 마당에까지 왔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도토리들의 욕심은 대단하다니까. 그래서 내가 도토리들에게 단단히 경고 좀 해두었지.


"내가 경고하지만 이제 너도 끝이야!

지금 이대로도 혼자 충분하다며 언제나 변하지 않을 듯 네 껍질은 단단하지. 하지만 넌 껍질 속에 숨어 들어가 있는 주제에 자유 타령이나 하고 호기심만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만 했어.


영원히 씨앗인 상태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데 혼자 날 수 있다고 자기 날개를 잡지 말라고 껍질 속에서만 중얼거리고만 있는 거야!


그런 씨앗의 시간은 이제 끝났어!

이제 봄이 와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내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보니 봄은 너무 잔인한 거야.

도토리가 깨져야 맞을 수 있는 봄.

도토리가 죽어야 오는 봄에

그는 아마 온몸이 부서져야만 하는 큰 고통을 겪을 거야.


우리 고양고양님들은 겨우내 멋지게 찌웠던 털만 좀 빠지면 봄맞이 준비가 끝나는데, 씨앗들의 봄은 좀 가혹한 것 같아. 그래서 씨앗이 준비가 될 때까지 좀 기다려 줘야 할 것 같아. 그 안의 중얼거림이 끝나고 힘이 터져 나오는 순간까지 말이야. 그리고 봄은 이번에만 오는 것은 아니거든.

난 그렇게 생각해.

언제나 여유로운 고양고양이님의 생각 말이지.


멍청하다 했지만 사실 그들의 용감함이 부러웠었어.

자기가 떨어진 바로 나무 아래가 아니라 아주 먼 곳으로 굴러가는 것에도 거침이 없더라.

영역에 신경 쓰지 않는 씨앗들의 모험이 오히려 인간이나 우리 고양이들보다 더 위대해 보일 때도 있어.


그래서 이젠 그들의 시작의 순간을 가볍게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때를 알고 자기 껍질을 깨고 내민 그 작은 발의 한 걸음은 누구보다 특별하다는 걸 나도 이제 깨닫고 있어.

어느 모를 날이 아니라 지금 이 봄에 이곳을 선택해 내 앞에 나타난 그는 누구와도 다르게 특별하니까.

이제 그들을 웃기는 도토리라 부르지 않을 거야.


출처 픽사 베이


이제 씨앗이 깨지고 땅을 파고드는 움직임으로 봄이 시작되었어.

난 사실 지난가을부터 나무위 껍질 속에서 외치던 도토리들의 소리를 들은 게 기억나.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머물 수 있지만

자유에 따라 움직이겠다고

한 곳에만 있지 않겠다고 소리치며

높은 나무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도토리들의 후두둑 소리 말이야.


그런데 도토리는 그때 출발했던 여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이라 생각도 못했겠지만 난 그 목소리를 기억해. 하지만 모른척해줄 거야.

왜냐면 그때의 도토리와 지금의 그는 무척 다르거든. 싹이라는 엄청난 것과 뿌리라는 더 깊고 안 보이는 발이 모르는 사이에 엄청나게 커져있더라고.


사진출처 픽사 베이


그리고 나도 이젠 달라졌어.

난 더 이상 인간에게 쫓겨 다니며 사는 곳을 옮겨 다니던 길가의 길냥이가 아니야. 내가 머무는 데크에 회색 포근한 숨숨집을 마련해준 소녀가 이름을 붙여주었어 '치르치르'라는데 인간들한테는 아주 유명하다던데? 그러니까 난 이름 있는 유명한 고양이가 되신 몸이라고!


평생을 자유를 찾아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어. 내 동생 미치르랑 말이야.

하지만 따뜻한 곳과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들과 있으면 맛난 간식이 나와서 살짝 날 붙잡기도 하지만 매이지 않고 언제든 밖을 돌아다니며 자유로울 수 있는 마당 고양이님도 될 수 있단 걸 알았어.

어느 곳이든 그곳이 이 고양이님이 원치 않으면 감옥이 되는 거야.


이제 나도 도토리처럼 하얀 발을 이 집의 데크에 내리고 살기로 했어. 간식과 햇살 때문만은 아니야. 뭔지 모르게 느껴지는 다정한 기운이랄까? 음.. 나에게 말을 거는 그 상냥한 목소리에 언제부턴가 이상하게 같이 대답하고 노래를 부르는 게 즐거워지고 있어. 흡! 인간이 좋아진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아무튼 봄은 시작인가 봐.


한 곳으로 뿌리내리기 좋은 시기인 거지. 떠도는 씨앗이 한 곳에 머물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이 몸이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다 살짝살짝 놀이터를 다녀올 준비가 시작되는 시기이지.


하지만 몇몇 도토리 친구들은 좋은 장소를 찾지 못했을지도 몰라. 씨앗인 채로 있는 도토리들이 만약 다시 구를 힘이 있다면 바람에 몸을 부지런히 맡겨보라고 말해줘. 좀 늦게 피는 꽃이 있잖아, 이번 봄은 씨앗의 형태로 무르익다가 다음 봄에 싹을 틔우는 친구들도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위로도 해주라고!


참고로 말해두는데 난 그저 도토리가 큰 나무로 가는 긴 여정 중의 겨우 한 부분- '웃긴 도토리 시절'밖에 못 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거야. 나처럼 주변에서 말하는 소리는 다람쥐들처럼 싹 잊어버려도 좋아. 떡잎만 보면 안다는 쓸데없는 소린 반은 거짓말이야. 나무도 인간도 이 고양고양님들 인생보다 훨씬 더 길더라 아무도 떡잎이 어찌 변할지 모른다고. 짧은 인생, 나처럼 도토리만 보고 말하는 헛소리는 무시해 버리라고. 흠~ 나 좀 카리스마 있지 않니?


앞으로 도토리가 큰 나무가 될 때까지 이 고양고양님의 인생이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큰 상수리나무로 그가 변한다면 "난 그때 그 웃긴 도토리다냥~ " 하고 그가 꼭 신호를 보내주면 좋겠다.


사실 모습을 바꾼 그를 잘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고양이는 뭐 후회 따윈 하지 않아. 잘 지내고 있겠지 뭐. 흥! 하고 태평 낮잠을 자고 있을지 모를 나를 무심하다 원망 말아줘.

어쩌면 어느 날 내 아기들이 자라 벅벅 긁고 있는 나무가 도토리 너의 옆구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우리 고양고양님들이 시원하게 긁어 댈 나무가 될 도토리야~

새로운 시작이 너무 기대되는구나!

이제 봄이 왔어. 어서 아래로 위로 무럭무럭 자라라~"


그리고 인간들아~ 이 고양고양님에게 봄을 잘 배웠니?

그럼 다음 시간 내가 좋아하는 봄노래를 살짝 들려줄게. 이만 안녕~


왼쪽: 치르치르 오른쪽: 미치르

눈감아도 난 다 보고 있다! -치르치르 미치르

(끝)


*매거진의 이전 글 송유정 작가님의 <개명 사유서> 늘봄 새봄


* 매거진의 이전 글 보리 작가님의 <봄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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