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의 역사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 난다 (2022) 중 ‘오타쿠의 덕’ 중에서(254p)
평론가 신형철 작가는 인생의 역사라는 책에서 일본어 ‘오타쿠’가 ‘ 오덕후’에서 ‘덕후’라고 불리게 되면서 한자어 ‘덕’을 떠올리게 된 이야기를 썼다. 그러면서 덕질을 교통사고의 속성과 비교하며 ‘덕통 사고’라는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한 대상에게 불현듯 마음을 뺏기는 이러한 드문 사건’인 덕질이 교통사고처럼 부정적인 쪽이 아닌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도 덕질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종종 글을 쓴 적이 있다. 중학교 시절 즈음 시작한 어린 나의 덕질은 강렬했던 감정에 비하면 약간은 소심했다. 그러다 대학 때 갑자기 얻게 된 커다란 자유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진짜 충분히 사랑해도 되는 걸까?’ 하고 멈칫했다. 오히려 사랑을 드러내는 것에 어색해했다. 철없어 보이는 맹목적인 사랑을 드러내기 부끄럽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돌아보면 ‘뉴키즈 온 더 블록’과 키무라 타쿠야를 덕질하며 팝과 영어, 일어에 빠져들며 외국의 문화와 언어를 덕후로서 접했던 경험은 한계 지어진 작은 세계 안에 살았던 한 소녀의 꿈을 크게 만들어준 긍정적인 기회가 되어주었다.
성인이 된 나는 키덜트로 분류되는 쪽의 단계를 거쳤다. 스탬프, 스티커, 각종 필기구와 노트 등의 문구류를 다람쥐처럼 모으고, 차나 커피, 다기 등의 기호식품 류의 새로운 것들도 빠져들어 수집했다. 뭔가 갖고 싶다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왠지 덜 채워졌던 것 같았던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성인의 덕질을 통해 완벽하게 서랍에 채워졌다.
그러나 물건에 대한 덕질인 경우 쉽고 빠르게 욕망이 채워졌던 만큼 금방 허무해져 버렸다. 새로운 것에 끊임없이 목말라했다. 어반 스케치나 사진도 한동안 빠져있었는데 집중해서 공을 들여 기술을 연습하는데 들이는 덕질의 시간보다 쉽게 소유욕구를 채우는 쪽의 덕질 쪽을 더 자주 택해버리고 말았다.
나의 덕질은 마음에 비해 행동이 늘 주춤거렸었다. 내가 좋아해서 빠져들었던 소중한 유형, 무형의 것들이 남이 보기에는 최악의 쓸데없는 취미들로 보이게 될까 봐 신경이 쓰였다. 나 스스로도 시간낭비, 돈 낭비, 체력 낭비했다고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기준이 나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효율성과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어 판단하는 어른의 분석기가 익숙해져 갔다. 그 기준에 맞춰 돈 안되고 낭비되는 덕질에 들이는 시간을 점점 줄여갔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줄여갔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도 함께 줄어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러던 중 나는 아이를 낳고 덕후의 마지막 능력을 긁어모아 아이에게 쏟으려 도서관 덕후가 되었고 아이 책 고르러 갔다가 내 책을 더 많이 골라오는 책 덕후가 되었다. 책 덕후는 책과 관련된 모든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책 덕후는 아주 포괄적이고 할 일이 너무 많은 덕후다. 그래서 책에 대한 무슨 일을 해도 신이날 수 있는 덕후다. 책 덕후가 되고 나는 더 이상 주변의 이야기를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책 덕후의 특징은 비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책님을 가까이한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 스스로에게도 관대해진다. 책 덕후의 책 수집은 동네책방에서 주인장 탱님과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글 친구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한다. 하브루타로 질문하는 독서모임 친구들에게서도, 절판 책과 키북(Key book 해당 분야의 핵심 책) 들을 깊이 있게 읽고 만나는 맘 북살롱 친구들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한 달 중 덕후의 책 수집이 너무 심하다 싶으면 도서관에서 책 덕후로 2주간 좋아하는 책탑을 쌓는다. 심장을 쾅 때리는 작가를 만나게 되는 책 덕후가 되면 그야말로 그때부터 그 작가의 덕후가 된다. 그때부터 책 덕후는 도서관 책탑은 던져버린다. 마음껏 찬양의 성호를 그어댈 나만의 책을 손에 넣는다. 그 한 작가에게 깊게 들어갔다가 그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까지 소개로 만나고 나올 때쯤엔 깜짝 놀라 있다. 책님 덕분에 자신의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 시공간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번 희열을 느낀 책 덕후는 한층 더 탐욕스러운 책 덕질을 계속해 간다. 어느덧 책 덕후 주변에 닮은 덕후들이 모여있다. 추천 책이나 매일 쓴 자신의 생생한 글과 댓글을 다정히 나누고, 만나본적 없지만 속삭이는 낭독으로 이미 그녀와 친해져 있다. 문장을 함께 나누자고 필사를 하자고 하는데 묵혀두었던 오래된 마스킹 테이프와 시키지도 않은 가을 낙엽 사진놀이를 하는 필사 덕후도 책 덕후의 취미가 되어간다. 같은 글에 자신만의 다른 색을 온전히 드러내며 서로를 물들인다.
그렇게 책 덕후는 서로를 영원히 붙들고 ‘사람’이라는 인생의 책들을 소개하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서로가 서로의 깊고 오래된 덕후가 되어간다.
'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덕후를 덕질하는 덕후의 최종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보글보글 글놀이
10월 5주
‘덕질’
*매거진의 이전 글, JOO 작가님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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