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고 남자 주인공에 빠졌던 경험 많이들 있을 것이다. 나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는 아니지만 드라마만 봤다 하면 남주에 가슴 설렌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드라마 관련 영상 및 남주의 프로필, 인터뷰 영상 등등을 찾아보며 남주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팬질은 기간 한정 얄팍한 관심일 뿐이다. 어차피 한 2~3주 있으면 시들해진다. 그런 내가 한 남자 배우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시간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때는 2004년.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대학원 선배들이 틈만 나면 일본 드라마와 배우 얘기를 한다. 여기는 일어일문학과가 아니고 중어중문학과인데 왜 온통 일본 드라마에 빠져 있는가? 나는 그때까지 일본 드라마를 본 적이 없었다.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나 예능, 책과 음악도 접한 적이 없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는 금기되지 않았던가! ('금기시'나 '불매 운동' 등이 아니라 진짜 개방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말 잘 듣는' 내가 접한 일본 문화라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들고 다니던 밴드 X-Japan의 요시키 사진이 전부였다. 그러나 너도나도 일본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변 환경 덕에, 남들 다 아는 걸 나만 모르는 게 싫어서 나도 일본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일본 드라마는 대학원 동기가 추천해 준 '굿럭!(Good Luck)'이었다. 기무라 타쿠야가 항공사 부조종사로 나오는 드라마인데, 그때까지 이름으로만 접하던 기무라 타쿠야를 드라마로 영접하고 그가 왜 인기가 많은지를 알게 되었다. 잘생긴 외모에 깊은 눈빛, 툭툭 던지는 듯한 말투까지. 그의 매력에 나는 흠뻑 빠졌다.
굿럭! (이미지 출처: 채널 J / 일본 TBS)
그리고 이어서 그가 검사로 출연한 '히어로(HERO)'와 피아니스트로 출연한 '롱 베케이션(Long Vacation)', 아이스 하키 선수를 연기한 '프라이드(Pride)' 등의 드라마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가 나온 드라마는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HERO (일본어 발음으로 히이로, 이미지 출처: 채널 W / 일본 Fuji TV) 롱 베케이션 (줄여서 롱바케, 이미지 출처: 채널 J / 일본 Fuji TV)
일본 드라마는 한 편이 10~12화로 짧아서 2~3일 만에 드라마 한 편을 뚝딱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무라 타쿠야에 대한 덕질은 드라마에서 예능 프로그램으로 넘어갔다.
기무라 타쿠야가 소속된 스맙(SMAP)이라는 그룹이 진행하는 스마스마(SMAP X SMAP)에는 매주 게스트를 초대하여 스맙 멤버들이 요리를 해 주는 코너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으로 기무라 타쿠야 외 다른 스맙 멤버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많은 요리 재료를 일본어로 공부(?)할 수 있었던 건 덤이었다.
나의 덕질은 기무라 타쿠야를 넘어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덕질로 확장되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드라마 명작과 유명 예능을 섭렵하려면 점심 시간을 쪼개고 잠자는 시간도 대폭 줄여야 했다. 살면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일이 있었나 싶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리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매일 노트북을 끼고 사는 폐인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좋아하는 것에 목적을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달려들 수 있었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일본 드라마와 예능에 대한 사랑은 입사 후에도 계속되었다. 물론 학생 시절만큼 시청하는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었지만, 일본 드라마와 예능은 왕복 네 시간 출퇴근 거리의 지루함을 달래주고 14시간 미국 출장길의 시간도 빨리 가게 해주었다.
2007년 일본 Fuji TV 방문 사진(젊다 젊어)
2007년 여름에는 일본 도쿄에 놀러 갔다. 그전에 도쿄에 갔을 때는 별 감흥이 없던 곳이 일본 대중문화를 좋아한 이후에 특별한 장소로 느껴지는 경험이 신기했다. 특히 오다이바에 있는 후지 TV를 방문하여 스마스마 세트장(실제 촬영장소는 아니고 비슷하게 만든 장소)에서 크나큰 반가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영화 'HERO' 관람을 위해 부산 영화제에 가기도 했다. 무대 인사 온 기무라 타쿠야 실물은 비록 콩알보다도 작게 보였지만 스크린에 가득 비친 그의 모습을 보며 '그와 내가 한 장소에 있다니!'라며 심장이 뛰었다.
2007년 부산영화제 HERO 무대 인사 (photo by Joanne 언니)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에도 끝이 있듯이 덕질에도 끝이 있었다. 일본 드라마는 교훈적 성격이 강하다. 처음에는 매력으로 작용하던 이 교훈적 성격이 서서히 지겨워졌다. 우리나라 예능과 많이 달라 신선했던 일본 예능도 보다 보니 더 이상 신선하지 않았다. 기무라 타쿠야에 대한 사랑도 여타 남자 배우에 비하면 정말 오래 갔지만, 결국 유야무야 사라지고 말았다. 약 6년 간의 덕질은 내가 아이 출산을 하면서 아예 막을 내리게 됐다.
나는 무언가에 미쳐 있는 사람이 멋있다. 한 가지 분야에 심취하여 파고 드는 사람이 부럽다. 어떤 일을 좋아한다는 것은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뭔가에 푹 빠져 지내지를 못한다. 그래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일본 대중문화에 빠져 살았던 옛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좋다. 만사 귀찮고 의욕이 없을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이 됐다. '나 그때 좀 열정적이었는데.'
그래서 그 열정이 무엇을 남겼냐고?
글쎄, 이베리코 부따(이베리코산 돼지), 에비(새우), 모찌리 도후(떡과 같이 쫄깃한 두부) 등과 같은 일본어 정도 남았으려나.
Special Thanks to 남편
그 당시 드라마랑 예능 영상 파일을 부지런히 다운받아 주고 플레이어 D2까지 사 준 당시 남친, 현 남편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 일본대중문화 개방은 1998년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개방 방침을 천명한 뒤, 1998년 10월, 1999년 9월, 2000년 6월 등 세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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