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 일본어 오타쿠에서 유래됨.
내 인생 최초의 덕질은 무엇이었을까?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즉, 기억이 닿는 범위의 첫머리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종이 책상 서랍 속 상자에 잔뜩 모은 지우개가 그 시작이었다.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이고 심지어 어떤 것은 향기가 나기도 했다. 아닌가? 종이인형이 시작이었나? 정성스레 오린 종이인형을 주인공 별, 의상 종류별로 끊임없이 사 모으고 오리던 것이 먼저인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덕질 전환과 보존의 법칙
덕질은 한 곳(사람)에서 다른 곳(사람)에게로 전환된다. 하지만 그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종이인형, 지우개 이후로 덕질은 계속되었다. 유덕화를 거쳐 판관 포청천에 나오는 하가경을 지나 김원준, 서태지로 이어지는 연예인 덕질은 기본이었다. 팬클럽에도 가입한 경우도 있었는데, 하가경에게서는 중국어로 쓰인 엽서도 받았다. 직접 쓴 것은 아닐 테지만 감격이었다. 해석불가라 어딘가에 고이 모셔두었을 텐데 다락방 투어에 나서봐야겠다. 서태지와 아이들 팬클럽은 당시 돈 3만 원을 주고 가입했던 것 같다. 야광 티셔츠가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거실 저편에서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내게 던졌다.
그러다가 그를 만났다. 내 모든 덕질 신경세포를 한 군데로 쏠리게 한 남자.
이전의 어떤 덕질보다 증상이 심각했다. 그와 만난 지 200일 되었을 때는, 담배 200개비 하나하나에 문구를 적어 선물했다. 이 담배를 다 피우면 금연할 것을 권하면서. 300일 되었을 때는 100일 전부터 써 내려간 엽서 100장을 선물했다. 그와 만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으며 그가 어학연수를 떠났던 동안에는 매달 20만 원 상당의 전화비를 내며 연락을 했다. 결혼 후에도 스토커 수준의 덕질은 이어졌고 영원할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그 덕질도 막을, 내렸다.
자식을 키우는 일도 나에게는 덕질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나만 몰랐지 누가 봐도 극성스러운 엄마였기 때문이다. 먹는 것부터 입는 것, 배우는 것, 안전에 이르기까지 따지고 신경 쓰며 키웠다. 만일 '나도 그런데?'라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면, 우리는 같은 종류의 덕후였던 것.
자식 덕질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서서히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일이나 봉사, 친구 등 다원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 총량은 변하지 않았다. 늘 분주한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번째, 덕질 작용 반작용의 법칙
내가 뿌린 덕질만큼의 영향을 나도 대상에게서 받는다.
대상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사람이건 물건이건 상관없이 덕질의 대상은 나에게 내가 뿌린 애정의 강도만큼 만족감을 준다. 자신감 없고 소심했던 초등학생은 서랍 속에 모아둔 지우개를 보며 희열을 느꼈다. 연예인을 끊임없이 갈아타며 덕질을 이어갈 때, 그놈은 너를 알지도 못할 것이라며 혀를 차고 걸레를 던지는 어머니의 핍박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사랑과 정성이 그에게 닿아 좋은 연기와 노래로 나에게 보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되기 전 그를 향했던 미친 덕질은 평생의 반려자와 행복한 가정이라는 보상을 주었으며 아이들로 향했던 덕질은 그들의 존재 자체로 충분했다.
덕질은 관계다. 관계의 균형이 얼마 동안 유지되느냐가 덕질 유효기간의 관건이 된다. 이상 이하도 아닌 딱 내가 보낸 만큼의 만족감이 돌아와야 한다. 나의 덕질보다 더 큰 애정을 덕질 대상이 내게 보이려고 하면, 거북스럽다. 과하게 들이대는 사람을 딱 싫어하는 나의 성격상 그런 경우 정이 떨어져 밀어내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덕질 상대를 보아도 자극이 없어지면, 덕질로 나의 마음이 더 이상 분주해지지 않게 되면, 나대던 심장이 심드렁한 상태가 되면, 상대를 향한 덕질 유효기간은 끝나버린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내가 준만큼의 기쁨과 만족을 주는 대상으로 갈아타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덕질 우라질의 법칙
제길, 덕질은 나만 하는 게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적당히 했어야 했다. 나도 누군가의 덕질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말이다. 그걸 간과한 게 나의 인생 최대 실수였다.
내가 그를 향해 덕질을 할 당시만 해도 그는 다른 것에 덕질 중이었다. 술, 취업, 직장, 친구, 돈... 그러니 나 혼자 마음 놓고 덕질을 할 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 덕질의 대상을 나로 콕 집었다. 수시로 전화하는 것은 물론 미친 스킨십을 시전한다. 요즘 들어 부쩍 내가 하는 일과 일정을 궁금해하고 자꾸 말을 건다. 코로나에 걸려 격리되어있는 이번 주만 해도 자꾸만 방에서 나와 말을 걸고 관심받고 싶어 안달이다. 덕질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코로나 환자가 설거지는 왜 하고 빨래는 왜 넌단 말인가. 욕을 한 바가지, 구박을 두 바가지 던져도 허허 실실 웃고 마는 그는, 내게 덕질 중이다. 우라질....
* 대문 사진은,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중인 제 덕후에게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근거하여 차려 준 밥상입니다.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보글보글과 함께하고픈 재미난 주제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로 제안해주세요.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매주 일요일 주제가 나간 이후, 댓글로 [제안] 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