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어즈&이어즈(Years and Years)>
지난 13일 오후 4시, ‘입막힌 자들의 도시’에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두 곳이 맞붙었다. 넷플릭스는 <킹덤> 시즌2를 선보였고, 왓챠플레이는 <이어즈&이어즈>를 단독 공개했다. 공교롭게 두 시리즈 모두 디스토피아 장르물이다. <킹덤>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아포칼립스 드라마고, <이어즈&이어즈>는 가까운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SF 드라마다.
좋은 작품에 승패를 가르는 건 무의미하다. <킹덤>이 더욱 화려해진 라인업과 탄탄한 스토리로 ‘상반기 최대 기대작’의 명성을 이어갔다면, <이어즈&이어즈>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는 ‘예지몽’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브렉시트안이 작년 EU 회의에서 통과된 후 15년이 흐른 미래. 우린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이어즈&이어즈>에서 미리 엿볼 수 있다.
<이어즈&이어즈>는 영국 공영 방송사 BBC, 미국 케이블 채널 HBO가 공동제작한 6부작 드라마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영국 특유의 블랙 코미디가 녹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은 SF 드라마 <닥터 후>의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각본을 썼다. 여기에 <해리포터> 트릴로니 교수 역, <러브 액츄얼리> 캐런 역을 맡았던 엠마 톰슨이 출연한다. <블랙미러> 시즌 1의 충격적인 첫 화 ‘공주와 돼지’ 편에서 영국 총리로 나왔던 로리 키니어도 합류해, 해외에선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다.
우리가 기대하고 두려워하는 미래의 모든 것이 <이어즈&이어즈>에 담겼다. 기업가 출신 정치인 비비언 룩(엠마 톰슨)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신경 뭣도 안 씁니다(I don't give a XXXX)”라고 답하며 폴리테이너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배타적인 자국민 우선주의자지만 그렇다고 국민을 위한다고 볼 수도 없는 그가 인기를 얻어가는 동안, 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드라마 속 라이온즈 가족이 겪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성소수자 차별, 자동화와 대량실업, 긱이코노미, 난민 갈등, 무역전쟁, 금융위기, 방사능 피폭, 그리고 시리즈 후반에 등장하는 바이러스까지. 수많은 이슈가 정교한 사회 풍자 문법으로 그려진다. 그래서일까. ‘멘붕’한 등장인물들이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까(What happens next)”라고 묻는 말에, “지금 일어나는 일들(What happens now)”이라고 답해야 할 것만 같다.
핵이 떨어져도 사람들의 일상은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공지능(AI)으로 대변되는 과학 기술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스티븐(로리 키니어)의 큰딸 베서니(리디아 웨스트)는 트랜스휴먼을 꿈꾼다. 증강현실(AR) 이모지로 대화하고, 눈 깜빡임으로 사진 찍고, 핸드폰 없이 손으로 통화하고. 이뿐만 아니다. 육신의 제약에서 벗어나 클라우드에서 영원히 존재하길 원한다. 베서니로 그려진 미래 인간의 모습은 뤽 배송 감독의 영화 <루시>보단 현실적이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 속 ‘완전한 은둔자’보단 이상적이다.
뇌과학과 AI 칩이 핵심인 ‘뉴노멀 인간 프로젝트’는 드라마 밖 현실에서도 시작됐다. 벌써 몇 년 전이다. 2016년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CEO 엘론 머스크는 뇌-기계 인터페이스(Brain-machine interfaces, BMIs) 구축을 목표로 생명공학 스타트업 뉴럴링크를 설립했다. 미세한 AI 칩과 섬유 전극을 통해 인간과 인공지능을 연결해서, 디지털 정보를 뇌에 업로드하거나 사람의 생각을 컴퓨터로 다운로드하는 게 최종 목표다. 작년 7월 원숭이 뇌에 AI 칩을 심는 데 성공했고, 올해는 인간에 직접 실험하기 위해 미국 식품의약청(FDA)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구체적인 인수 금액은 비공개지만 5~10억 달러 규모로 알려진 ‘AI 업계 핫딜’인 페이스북의 콘트롤랩스 인수 사례도 있다. 페이스북은 작년 9월 콘트롤랩스를 인수해, 자사 AR 스마트렌즈 개발부서 리얼리티 랩스에 합류시켰다. 콘트롤랩스는 인간 뇌의 전기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기계를 원격 조종하는 기술을 개발해왔다. ‘마음을 읽는 기계들’과 ‘몸속으로 연결된 인간들’. 판이 바뀌고 새로운 하이브리드 종이 탄생하는 거다.
모두가 점점 망해가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아직까진 내 문제가 아니니까. <이어즈&이어즈> 속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비싼 값을 치르면서도 마냥 괜찮다고 시스템을 믿거나, 앉아서 종일 남탓을 하는 하거나. 모두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우린 너무나 보잘것없이 작은 존재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쉽게 수긍해버릴 때 문제 상황은 변함없이 지속되기 마련이다. 이때 <이어즈&이어즈>에서는 할머니 뮤리얼(앤 리드)의 일침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폭주에 제동이 걸린다.
2029년, 여느 해와 다름없이 새해를 기념하는 폭죽이 터지고 뮤리얼의 생일날도 돌아온다. 자식과 손자들이 다 모인 기쁜 날, 뮤리얼은 전 세계가 이 지경인 건 “모두 우리 탓”이라고 찬물을 끼얹는다. 모두들 “왜 우리 탓이냐”며 반발하지만, 뮤리얼은 “우리가 만든 세상”임에 틀림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가게 주인이 가난해져도 티셔츠를 싼값에 샀다며 좋아하고, 계산대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함께 눈 마주칠 번거로움도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스티븐과 달리 “모든 게 다 우리 탓”이라는 뮤리얼. 둘의 상반된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지나친 상상으로 ‘선’을 넘어버린 게 아니라, 오히려 ‘선’을 넘을 만큼 행동하지 않았기에. 우린 서서히 무너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기술은 그 자체로 무해하다. 기술을 만들고 쓰는 사람의 의도가 유해할 수 있을 뿐. AI 칩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단으로 도청할 수 있으나, 뇌나 척수 손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 딥페이크 기술은 가짜 뉴스를 무분별하게 낳을 수 있으나, <코코>처럼 먼저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들을 다른 차원에서 만날 기회를 주기도 한다. 얼굴 인식 카메라는 소수 인종을 탄압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으나, 테러 범죄자를 잡아내 더 큰 위험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AI를 비롯한 모든 기술에는 윤리가 중요하다. 위험하게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은 세밀히 규제하면서도 기술의 장점까지 지우면 안 되기에. 답을 찾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비록 오래 걸릴지라도 말이다.
‘시리야’, ‘알렉사’, ‘클로바’, ‘오케이 구글’, ‘헤이 카카오’, ‘하이 빅스비’. 허공에다 이름을 불러도 용케 알아듣고는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다. 이외에도 우리 주위엔 참 편리한 친구들이 많고, 우리는 이들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눈을 마주쳐야 할 불편이 세상에 남아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그런 불편이 아직은 많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은 “디지털 사회 속에서 인간은 디지털 재화로 쓰이며, 트랜스휴먼이 곧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다. 그가 이어 한 말로 <이어즈&이어즈> 한 줄 요약을 마치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컴퓨터를 이기는 것도, 컴퓨터 자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컴퓨터를 수단으로 충분히 활용하면서 우리의 인간성(manhood)이 확보된 미래라고 생각한다.’
<이어즈&이어즈(Years and Years)>
공개 | 2019년 5월(영국), 2020년 3월(국내)
감독 | 사이먼 셀란 존스, 리사 멀케이
출연 | 엠마 톰슨, 로리 키니어, 제시카 하인즈 外
(이미지 출처: 왓챠플레이, bioRxiv, AU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