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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Mar 27. 2020

“비싸고 불편한 걸 왜 아직도 써요?”

‘큐레이션의 철학’, 내가 필름카메라를 잡게 된 이유


“광범위한 선택 범위는 우리를 압도해 버린다. 올바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쉽사리 짐으로 느껴지곤 한다. 선택의 순간에 갈등하고 망설이는 것은 물론이다. 선택의 종류가 너무 많으면 결국 하나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 마이클 바스카, <큐레이션>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
이라는 말이 있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오히려 만족스러운 결정을 방해한다는 거다. 한동안 사진 때문에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DSLR이 주는 ‘장비빨’을 알아버렸던 탓이다. 지갑에 틈만 나면 렌즈를 사모았다. 태생이 열심인 인간이라 카메라에도 예외가 없었다. 그 언제나 입문자였지만,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명도, 감도, 조리개, 셔터스피드까지- 내가 조율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열과 심을 다했다.

그러다 권태기가 왔다. 문득 이것저것 노력하는 게 귀찮아졌고, 카메라는 그대로인데 가방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DSLR에겐 잘못이 없다. 그렇게 한동안 아이폰과 외도하다가, 필름카메라를 만났다. 그렇다. 이 글은 필름카메라 예찬이다.


우연에 운명을 맡겨라

필름카메라, 다른 것 없다.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똑딱이 버튼을 누르면 된다. 인화할 때까지 결과물은 모른다. 여타 DSLR, 미러리스처럼 ‘수동’ 필름 카메라가 있으나, 개인적으로 필름카메라의 매력은 ‘자동’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선택지에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촬영 순간의 빛과 피사체의 움직임에 기대면 된다. 디지털이 여러 필터와 색감 설정으로 필름을 따라하려 해도, 우연의 아름다움은 절대 따라오지 못한다.

게다가 여기저기 긁히고 손떼 타서 낡아 보이는(실제로도 낡은) 필름카메라로는 누군가를 탓할 필요도 없다.  찍으려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사진을 부탁하는 사람도, 찍어주는 사람도 부담이 덜하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큐레이션’

그래서 대충 찍느냐, 그건 아니다. 필름 한 롤에 3000원, 현상에 3000원- 비용도 비용이지만 한 롤에 36컷밖에 담지 못하기 때문에 한 컷 한 컷, ‘컷의 순간’을 정성 들여 고민하게 된다. 무작정 여러 장 찍고, 마음에 안 드는 사진은 즉시 지우거나 곧장 클라우드행(?)으로 보내버릴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는 다르다. 최대한 짐 없이 몸뚱이로만 여행하는 난 더욱 신중히 패를 던져야 한다. 적절한 순간, 아주 현명하게, 꼭 남기고 싶은 장면만. 그래서 필카는 인생을 담고, 또 인생과 닮았다.

필름에는 정말 여러 종류가 있다. 그래서 각자 취향에 맞는 필름을 골라 쓸 수 있고, 새로운 필름을 시도하면서 자신에게 잘 맞는 색감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 나는 여행지가 가진 메인 색감에 필름을 맞추는 편이다. 와인빛의 빨간 지붕이 가득한 포르투에선 포트라를, 노란 트램과 초록빛 골목으로 물든 리스본에선 후지를 썼다. 좋은 을 솎아내기 위한 선별작업이자, 단순화와 맥락화의 과정인 큐레이션의 철학과 맞닿는다.




P.S.
정말 좋은 사람은 언제 봐도 좋듯,

정말 좋은 곳은 언제 가도 좋다.

사진 보니까 또 앓는다, 나의 제2의 고향들.

- 포르투, 암스테르담: 나 좋아하지 마.

- 히재: 그게 뭔데.

- 포르투, 암스테르담: 나 좋아하지 말라고.

- 히재: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필름카메라
#36.5도의_레트로사랑꾼


Olympus MJU I Stylus AF 35mm

Fuji C200, Kodak ColorPlus 200, PORTRA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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