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플랫폼(El Hoyo)>
*이 글에는 영화 <더 플랫폼(El Hoyo)>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자유란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값진 재산 중의 하나다. 하늘이 내려 준 빵 한 조각을 하늘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감사할 필요 없이 떳떳하게 먹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야.”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극한 상황에서 생존이 위협받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까? 영화 <더 플랫폼>의 주인공 고렝(이반 마사구에)은 학위를 따는 조건으로 6개월간 수직 감옥에 갇힌다. 구체적으로 어떤 학위인지 영화에 드러나진 않는다. 분명한 건, 그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제 발로 감옥에 찾아간다는 것. 취업 면접처럼 깐깐한 과정을 거쳐서 말이다. 일명 ‘수직 자기관리 센터’로 불리는 이곳의 설정은 꽤나 특이하다.
우선, 가장 중요한 음식 배급.
식사는 하루에 한 번, 감옥 꼭대기층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식탁인 ‘플랫폼’을 통해 주어진다.
단, 위층부터 순서대로. 위층 수감자가 먹고 남은 음식 그대로 아래층 수감자가 받는다.
셀메이트는 영원하다. 한 명이 수감기간을 다 채워 풀려나거나 ‘불의의 사건’으로 죽지 않는 한.
이렇게 예외가 생기면, 각 층마다 2명씩 감금한다는 룰에 따라 다음 달 새로운 셀메이트로 바뀐다.
빨간 불빛 속에서 수면가스가 퍼지는 날이 ‘그날’이다.
수감자들이 머무는 층은 매달 무작위로 바뀐다.
잠에서 깼을 때 어디서 눈 뜰 지는 철저히 운에 달렸다.
가장 꼭대기층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사람도 하룻밤 새 가장 밑바닥층을 배정받을 수 있다.
그래서 감옥은 도대체 몇 층이냐고? 아무도 모른다. 바닥이 아닌 꼭대기층을 ‘0층’으로 부르기 때문.
‘10층짜리 빌딩’이라는 말에서 자연스럽게 건물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 현실과는 다르다.
스페인 원제처럼 끝이 안 보이는 구덩이(El Hoyo)가 공포를 자아낸다.
자, 이제 감방생활에 들어갈 준비가 됐나?
본격 수감되기 앞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 담배만 빼고.
초고속 무중력 엘리베이터를 보는 듯한 ‘플랫폼’을 제외하면, 영화의 장르는 SF 스릴러보다 오히려 종교 스릴러에 가까워 보인다. 짚고 넘어가자면, 스릴 넘치는 통쾌함을 기대하는 관람객, 혹은 식인 묘사 등 잔인한 장면을 기피하는 관람객에겐 영화를 추천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 우리의 정서도 피폐해진다. 다만, <더 플랫폼>은 감독 특유의 색깔이 담긴 코드가 가득하다는 장점이 있다. 영화가 직선적이기보다 함축적이기 때문에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한참 후에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직 감옥의 ‘가장 낮은 층’인 333층은 천사의 숫자, 이곳에 갇힌 감옥수의 숫자 666명은 악마의 숫자로 읽을 수 있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그 성격이 바뀔 수 있음을 생각해보면, 천국도 사람들 사이에 놓였을 때는 지옥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지옥에서는 ‘누구 편’이랄 것도 없다. 그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벌어질 뿐. <더 플랫폼> 속 인간의 잔혹성은 계급사회를 수평적으로 그린 <설국열차>보다 더 참혹하다. 열차 안에서는 ‘우리 편’과 ‘너네 편’이 분명하기 때문에 꼬리칸 사람들끼리 자발적인 연대가 가능했다. <더 플랫폼>에서는 다르다. 다 함께 잘 살아보자는 희망 서린 협업은 찾기 힘들다. 같은 층에서 몇 달간 함께 숨 쉰 유일한 존재도, 때로는 내가 살기 위해 죽여야 한다. 3층에서 눈 떴을 때, 그리고 200층에서 눈 떴을 때 일관되게 같은 행동을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영화는 선(善)과 악(惡)을 뚜렷이 가르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누가 더 현실적으로, 누가 더 이상적으로 적응하는지 그려낸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나누기 어렵듯, 사상의 좋고 나쁨 또한 정답이 없다. 에스카르고, 파나코타처럼 국적을 초월한 초호화 진수성찬이 매일 차려져도, 위층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폭식하는 탓에 아래층에는 국물조차 남지 않는다. 음식에 침이나 안 뱉었으면 다행이다. 이렇듯 음식도, 인간성도 바닥나는 자유주의의 맹점을 직접 해결하고자 고렝은 ‘강제 배급’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마치 엘리베이터를 타듯 플랫폼에 올라타서, 한층 한층 내려가면서 50층 아래의 수감자에게만 음식을 나눠준다. 고랭의 ‘큰 뜻’을 거부하는 이에겐 폭력으로 답한다. 그런데 인간다움을 기준으로 보면, 강제 배급도 최선의 카드는 아닌 것 같다. 누가, 무슨 권한으로, 누구에게, 얼마만큼 나눠주는가?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쥐어 팬다면, 결과적으로 옳은 일지라도 과연 옳은 건가? 배급 대상에서 빗겨 난 사람이 저번 달 내내 굶은 사람이라면? 수많은 질문이 이어진다.
<더 플랫폼>은 트리마가시(조리온 에귈레오)의 목소리를 빌려, 영화의 첫마디로 대답을 대신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비롯해 모든 선택과 이에 따른 책임은 결국 각자의 몫이라고.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꼭대기에 있는 자, 바닥에 있는 자, 그리고 추락하는 자”로 나뉜다며. 수직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이 머무는 층을 고를 수 없지만 추락만큼은 스스로 택할 수 있다. 낮은 층을 배정받은 사람들 중에는 비관에 사로잡혀 스스로 생을 끊고자 떨어져 내린 경우가 많았다. 고렝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특권층에서 말단층까지 자의로 내려간다.
사실 선택의 자유는 이 기괴한 사회 실험장에 들어서기 전에도 주어졌었다. 고렝이 거쳤던 셀메이트 3명은 입소 준비물로 각각 칼, 반려견, 밧줄을 챙겼다. 그리고 이들의 감방생활은 각자 고른 준비물만큼이나 다르게 펼쳐진다. 고렝의 경우, 그가 챙긴 <돈키호테>의 길을 따른다. ‘변화의 메시지’를 올려 보내고 감옥의 가장 밑바닥에 홀로 남기로 결정한 것. 앞서 죽은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뿐 아니라, 살아남는 과정에서 자신이 이미 타락해버린 걸 느꼈기 때문일 거다. 고렝의 추락은 늦게라도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이였다. 생존을 버리고 실존을 택한 그가 돈키호테의 대사를 말한다면 아래와 같지 않을까.
“자유란 하늘이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값진 재산 중의 하나다. 0층에서 내려 준 빵 한 조각을 하늘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감사할 필요 없이 떳떳하게 먹는 것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길이야.”
<더 플랫폼(El Hoyo)>
개봉 | 2020년 5월 13일 (국내)*
감독 | 가더 가츠테루-우루샤
출연 | 이반 마사구에 外
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미주, 유럽만 넷플릭스에서 공개 / 국내는 극장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