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
영화, 음악, 금융, 뉴스레터까지- 취향과 데이터를 결합해 누구나 큐레이터가 되는 요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등장을 지금보다 3년 앞서 예측해, 구체적인 서비스로 발전시킨 곳이 있다. 스타트업이 아니라 무려 미술관이다. 오래 전 미술관에서 태어나고, 우리 일상에서 확장된 ‘큐레이션’의 개념을 다시 미술관에 적용한 셈. 관람객 모두를 큐레이터로 만든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Stedelijk Museum Amsterdam, 이하 스테들릭)의 전시 공간 기획법을 이번 글에서 다뤄본다.
“스테..뭐요?” 다소 낯설게 들릴 수도 있지만,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스테들릭은 세계적인 현대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19세기 추상화부터 3D 프린팅화까지, 9만점이 넘는 작품으로 현대 미술과 디자인의 역사를 총망라하기 때문.
전시 공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본관 1층 ‘스테들릭 턴즈(TURNS)’는 주제별 전시, 본관 2층 ‘스테들릭 나우(NOW)’는 특별 전시, 별관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 ‘스테들릭 베이스(BASE)’는 소장품 상설 전시를 다룬다. 이중 스테들릭 베이스는 미술관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피트 몬드리안, 바실리 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 앙리 마티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비롯해, 각 시대의 아이콘을 앞다투는 거장들의 작품 750여점을 선보인다.
소장품만으로도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스테들릭 베이스는 2017년, 건축사무소 OMA의 공간 기획으로 한 단계 진화한다. ‘평범한’ 심장이라는 단어처럼 역설적인 단어는 없지만, 비유하자면 아이언맨의 ‘아크 원자로 심장’으로 업그레이드된 셈. OMA는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렘 콜하스가 세웠는데,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본사를 두고 있다. OMA는 현대 미술의 발전 궤적을 색다른 맥락에서 경험해볼 수 있도록, 스테들릭 베이스를 새롭게 설계한다.
핵심은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이다. 바로 ‘방’을 없애는 것. 흔히 미술관을 가면 ‘2000년대 히재의 방’처럼 전시 공간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데, 스테들릭 베이스에는 방이 없다. 대신, 스크린처럼 얇은 슬림형 강철 가벽이 있다. OMA는 두꺼운 강철을 1.5cm 두께로 자르고, 이어 붙이고, 진동 표준 테스트를 거쳐 세웠다. 이렇게 만들어진 벽과 벽 사이 열린 공간에서 근대와 현대, 예술과 디자인을 잇는 뜻밖의 즐거움이 펼쳐진다.
가벼움과 유연함을 갖춘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은
작품을 보는 동선을 직접 개척할 수 있다.
마치 도시를 여행하는 것처럼.
- 렘 쿨하스, OMA 파운더 & 디렉터
기존 전시관들이 ‘방에서 방으로’ 혹은 ‘입구에서 출구까지’ 하나로 짜여진 전시 동선을 제공하는 반면, 스테들릭 베이스는 개방적인 동선을 제공한다. 작품을 관람하는 순서에 정답은 없다. 큐레이터가 된 관람객은 산책하듯 발걸음을 옮기면서, 어떤 작품을 어떤 순서로 볼지 각자 관심사에 맞춰 선택할 수 있다.
여타 ‘기획 맛집’처럼, 스테들릭 베이스의 공간 디자인 또한 관찰에서 출발했다. 의식하든 못하든, 우린 매일 검색을 통해 쏟아지는 정보를 동시에 빠르게 캐치한다. 나에게 좋은 건 살리고, 필요없는 건 버리면서. 네덜란드 일간지 NRC가 짚었듯, 모든 것이 혼합된 채로 보여지는 시대에서 보는 행위는 곧 구글링을 의미한다(Everything is shown in a mix, Looking is Googling). 우리가 정보를 찾고 이해하는 방식에서 나타난 변화가 이곳에 담겼다.
사람들은 이제 많은 이미지를
한 번에 보고, 연결하고, 조합해낸다.
우리가 겪은 변화를
스테들릭 베이스에 담았다.
- 베아트릭스 러프,
前 스테들릭 소장(2014~2017)
그저 복잡한 미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스테들릭 베이스는 관람객이 다양한 작품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게끔 철저한 계산 아래 설계됐다. 시대와 작가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있던 작품을 누구나 쉽게 이어볼 수 있다. 평생을 문과생, 졸업하고는 테크 업계에서 일했던 ‘미알못’인 나조차 미술에 눈 뜨게 했으니, 스테들릭의 실험은 성공한 셈이다. 점, 선, 면으로 이뤄진 몬드리안 그림에서 데스틸의 신조형주의 운동, 바넷 뉴먼의 차가운 색면 추상까지. 배경지식 하나 없이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면서, 그렇게 난 현대 미술에 입문했다.
모두에게 큐레이션의 자유를 준 스테들릭 베이스에도 원칙이 있다. 같은 시대 또는 같은 화조의 작품을 한 벽에 모아 전시한다는 것. 갤러리 입구부터 출구까지 정체성이 명확한 벽이 있기 때문에 관람객은 자신이 어디쯤 서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노잼(?)이거나 관심 없는 분야는 빠르게 스킵하기도 쉽다. 다른 모서리로 쓱- 지나가면 되니까.
친절한 안내 덕분에 작품을 공부하기도 좋다. 작품의 제목, 아티스트, 해설이 빠짐없이 벽에 붙어있다. 미술관이 갖춰야 할 아주 기본 중에 기본 소양이겠지만, 빼먹는 곳도 많다. 스테들릭의 전시관들은 아주 철저하게 기본을 지키면서, 오디오 가이드와의 연동으로 작품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게 도와준다.
마지막으로, UX가 뭐 있나. 세련된 외관과 넓은 공간감을 조성하는 천장뿐 아니라, 카페와 휴식공간까지 예쁘다. 난 매표소 앞 서점을 특히나 사랑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 햇빛이 드리우면, 뮤지엄플레인 광장의 초록 잔디밭이 비쳐 하나의 명화가 된다. 본격 큐레이션을 경험하기 앞서, 서점에서 간단히 디자인 눈요기를 해봐도 좋겠다. 미술관 건너편 알버트하인에서 레몬맛 라들러 한 병 사서 곁들이면 더 좋고.
*스테들릭은 코로나19 여파로 잠시 휴관했다가, 6/1(월) 다시 문을 연다.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을 모아놓은 특별전도 진행하니, 네덜란드에 계신 분들은 가보셔도 좋을 듯. :)
(참고)
Stedelijk BASE Opens 16 December 2017
AMO creates “open-ended” display system for Amsterdam’s Stedelijk 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