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 tried. Fail again. Fail better.
그동안 ‘내맘대로 취향수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부제는 영어 산문 매일 읽기.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단어와 달리 아주 소소하게, 매일 영어 산문 1개를 읽고 취향에 맞는 표현을 찾아 공유하는 온라인 스터디 모임이었다. 읽는 글도 자유, 올리는 문장도 자유였지만, 단 한 가지 룰은 100일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인증하는 것. 금요일, 주말도 당연히 포함이다.
100일은 짧을 것 같지만 길고, 뭔가를 매일 하는 건 쉬워 보여도 어렵다. 마지막 날인 오늘 인증률을 뜯어보니 93%. 썩 나쁘지 않다. 야근하느라 자정을 넘긴 날도, 정말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침대 속에 느르죽죽하게 녹아있던 날도 포함이니 꽤 성실한 점수라고 생각한다. 합리화에 좋은 변명들은 뒤로 하고, 아래는 공부하면서 느낀 장점들.
영어가 한국어보다 우수하다는 게 아니라, 언어를 가리지 않고 ‘좋은 글’을 찾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 운이 좋으면, 마음의 숙제처럼 자리 잡은 질문들에 답을 찾기도 한다. 베네딕트 에반스가 쓴 글이 나에겐 그랬다. 베네딕트는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벤처투자사(VC) 안드레센 호로위츠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널리스트인데, 자기 이름을 따서 블로그도 운영한다. 평소 인공지능(AI)과 얼굴 인식 윤리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그가 쓴 글을 추천 받아 아무 생각 없이 읽게 됐는데, 너무 놀랐다. 아니, 기술 윤리가 이렇게 재밌고 이해하기 쉬운 거였나요. 퇴근길 버스에서 폰을 못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쉼 없이, 호로록 맛있게 읽었다.
[Benedict Evans] Face recognition and AI ethics
There are large grey areas where we don't yet have a clear consensus of what ‘bad’ would actually mean, and how far we worry because this is different rather than just because it’s just new and unfamiliar. (...) That is, we worried what would happen if these systems didn’t work and we worried what would happen if they did work.
이러나저러나 모든 기술은 결국 사람의 손길로 만들어지고 쓰이기 때문에 너무나 ‘사회적’이며,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해도 문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도 문제라고 지적하는 점이 핵심이다. 최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도입된 모바일 신분증을 비롯해, 어떤 기술이 국가나 기업에 의해 ‘당연하게’ 도입되는 지금을 돌아보게 한다. 물론 기술의 장점은 선명하지만, 이건 결과보다 과정의 문제에 가깝다.
최근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이어, 미국 문화예술 산업에서 일하는 라틴계 종사자들의 인종 차별 금지 운동이 있었다. 이를 다룬 기사에서 ‘Latinx’라는 표현을 처음 봤다.
[ARTnews] In open letters, art workers demand that institutions do more to fight racism
“We recognize that to position all Latinxs as people of color is to erase the hegemony of whiteness and white supremacy in our communities. We reject anti-Black racism that has caused systematic marginalization and erasure of Afro-Latinxs. When Latinxs are understood to be a monolithic population, it erases our racial and ethnic diversity and dismisses the long, ongoing struggle for the equality and equity of Black folks.”
궁금해서 찾아보니 ‘Latinx’는 남성과 헤테로 중심의 스페인어를 타파하려는 대안적 표현이었다. 스페인어 문법은 성별에 따라 명사, 동사, 형용사를 다르게 구분한다. 예를 들어 남성 친구들은 ‘amigos’, 여성 친구들은 ‘amigas’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성 친구들만 있던 무리에 남성이 한 명이라도 끼면 ‘amigos’로 바꿔 불러야 한다. 이는 라틴사람을 뜻하는 ‘Latino’, ‘Latina’ 사례에서도 마찬가지. 하나의 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보편성을 띠게 하는 것도 문제고, 남성 혹은 여성으로 규정되지 않는 논바이너리처럼 ‘제3의 성’을 가진 사람을 배제하는 것도 문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Latinx’인 것. 즉, 영어에서 ‘they’의 쓰임과 비슷하다.
또 다른 맥락에서, 뉴요커의 논평은 팬데믹 사태에 맞춰 세심함을 일깨워줬다.
[The New Yorker] (Against) Virus as metaphor
Sontag wrote, “My point is that illness is not a metaphor, and that the most truthful way of regarding illness—and the healthiest way of being ill—is one most purified of, most resistant to, metaphoric thinking.” (...) In the weeks ahead, we are going to see a profusion of metaphorical interpretations of the coronavirus. We’ll be tempted to make them ourselves. But we must keep in mind the need for language to function in a literal sense, so that we can think clearly as we respond to the covid-19 virus.
우리가 언어를 쓰는 방식에 따라 실제 질병이 가진 위험성이 퇴색되거나, 혐오나 편견, 차별이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 글의 주제. 일상에서 은유처럼 쓰이는 표현들을 경계하자는 주장이 담겼다. 이런 비판 의식은 수전 손택이 쓴 <은유로서의 질병>과도 맞닿는다. 수전 손택은 질병은 질병일 뿐이며, 낙인찍힐 것이 아니라 치료해야 할 대상일 뿐이라고 짚었다. 그동안 ‘코로나 확찐자’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왜 묘하게 떨떠름했는지, 글을 읽고 나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영화 번역가 황석희님의 칼럼을 읽고 한번 더 확신했다. <해석은 되는데 번역은 좀...?>이라는 제목의 글로, “번역은 독해나 해석의 영역 다음에 있다”는 내용이다. 해외에서 오래 살면 문화적인 이해도나 친밀도가 높아서 번역문에 조금 더 정교한 뉘앙스를 덧붙일 순 있지만,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크게 공감했다. (그리고 위로가 됐다. 토종 코리안이라서.) 번역문도 결국 ‘한국어’로 쓰인 글이기에, 한국어 문장력에 크게 좌우된다.
[The Financial Times]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Not only because it might normalise the deployment of mass surveillance tools in countries that have so far rejected them, but even more so because it signifies a dramatic transition from “over the skin” to “under the skin” surveillance.
번역하다 보면, 문화권이 다른 독자를 위한 배려랍시고 설명을 덧붙이면서 글이 장황해지기 쉽다. 분명 이해를 돕기 위해 썼을 텐데, 예시 때문에 글이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고. 문학적 표현이나 전문 용어가 많은 글을 번역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외국어를 취미로 좋아하는) 번역가로서, 그리고 독자로서 항상 느낀 부분이기에 유발 하라리의 기고를 번역할 때도 이를 제일 먼저 고려했다. ‘근접감시’, ‘밀착감시’라는 용어 대신 감시의 초점이 “피부 겉에서 속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쓰면 좀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하면서.
한국어는 한국어일 때 가장 아름답고, 영어는 영어일 때 가장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더 잘 전달할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날 때부터 쓴 언어 능력도 느는 것 같다. 한국어가 조금 느니, 취미로 쓴 글들이 다음과 브런치 메인에도 운 좋게 소개될 수 있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뿌듯함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덤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혼자 하는 것보단 함께 할 때 더 재미지다고(?) 같은 곳에 있지 않아도 힘이 되는 좋은 동료가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지치면 지친 대로 힘을 잠깐 빼고 가자고요. 술 마시면서 다시 채우면 되니까요. 함께해주셔서 고마워요. 뭘 해도 우린 결국은 행복할 거야. 사.. 사...사랑한다아아악)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가 사무엘 베케트를 인용하면서 남긴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Finally, no translation is definitive — it’s simply a way to “Fail again. Fail better.”
I think I failed okay.
바로 스페인어. 오늘로서 두 달째,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10분씩 투자 중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재미’ 있어서 공부한다.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쓰고,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고. 나는 매번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글뿐만 아니라 일도,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데 못 할 건 없고, 혼자서도 못 할 건 없다.
그리고 몇 년 전엔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됐던 도블레에레[rr] 발음이 이제 된다. 한국어에도 없고, 영어에도 없는, 혀에 모터를 단 듯이 쉴 새 없이 굴려야 나오는 그 발음이. 아직 완벽하지 않아서 끊길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아-르-르-’에서 벗어난 게 어딘가. 정말 정직해도 너무 정직한 한국어 발음이라 나도 울고 내 혀도 울고 싶었을 거다. 무튼 <종이의 집>을 보고 스페인어 책을 다시 잡은 지 한 달 만에 찾아온 성공이었다. 성덕도 이런 성덕이 없다.
물론 한 언어를 읽고 쓰는 것은 정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걸 안다. 그래서 앞으로는 영어 쓰기를 연습하려 한다. 스페인어도 꾸준히 공부하고. 100일 해서 이만큼 달라졌는데 300일, 1000일 후는 또 다르겠지. 나중에 남미 어딘가에서 영어로 뭔가를 홍보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사람 일은 모른다.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스페인어권 나라로 떠나도 옛날과 다르다. 오들오들 추운 밤에, 혼자 조용히 호스텔 창문 닫으러 가는 대신 할 말이 생겨서 좋다. :)
(다 함께 외쳐봐요. 창문 좀 닫아주실래요?)
“Puede cerrar la ventana, por favor?”
#다들소rrrrrrl질rrrrrrrrrrrrㅓ #시작이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