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재 Feb 03. 2021

의미 없는 게 어딨겠어요

영화 <소울(Soul)>


삶을 섹시하게 만드는 그것


새벽부터 세차게 눈이 쏟아지던 아침. ‘몇 년 만의 폭설’에 ‘최강한파’까지, 겨울에 들을 수 있는 온갖 무서운 단어가 쏟아져도 뭐 별수 있나. 9년 전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전공도 아니고 철학 교양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머리가 비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요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건 나의 ‘열’과 ‘심’이었기에 꾸역꾸역 지하철에 몸을 욱여넣었다. 역을 나서자마자 우산을 쓴 손은 금방 무색해졌고, 나보다 남들이 더 부끄러워했던 빙판길 슬라이딩이 이어졌다.


그렇게 우당탕탕 치열한 여정을 거쳐 자리에 겨우 앉았는데, 웬걸. 교수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휴강을 때리셨다. 휴강 사유는 “우연은 삶을 섹시하게 만든다”며. ‘뭐요? 일찍 좀 말해주지’라는 마음이 분명 들었을 텐데, 야속함보다는 교수님의 그 말씀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계획에 없던 휴강에, 옷과 신발은 이미 망했던 그날, 눈이 깊게 쌓인 길을 다시 돌아가다가 느꼈다. 세상일이 내 마음 같지 않아도 그 나름의 즐거움과 짜릿함에 젖을 수 있다고.



무엇보다 위대한 오늘


영화 <소울>은 나에게 그때 그 뜻밖의 눈길 같은 영화다. 물론 차이점은 있다. 나야 기껏해야 두 손으로 셀 수 있는 과거지만, <소울>의 주인공은 다르다. 디즈니·픽사 제작진은 <코코>에서 주인공을 사후 세계(Great Beyond)로 보내버리더니, <소울>에서는 감독 피트 닥터와 손잡고 아예 태어나기 전(Great Before)으로 던져버렸다. 이들의 희생자(?)인 <소울>의 주인공 ‘조’는 뉴욕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 최고의 밴드와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는다.


그런데 꿈의 무대를 코앞에 두고, ‘조’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어 낯선 세상에 떨어진다. 뚜렷한 형체를 지닌 몸 대신 푸르딩딩하고 말랑말랑한 모습으로 그가 떨어진 곳은 바로 ‘유 세미나’. 꼬마 영혼들이 태어나기 전, 저마다 독특한 성격과 관심사를 만드는 곳이다. ‘조’가 현생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선택지는 하나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성인들마저 포기한, 세상에서 제일 시니컬한 영혼 ‘22’가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렇게 ‘22’와 ‘조’는 냉정과 열정 사이, 극과 극 케미를 보여주며 나를 나답게 만드는 걸 찾으려 모험을 떠난다.


<인사이드 아웃>, <몬스터 주식회사>, <토이 스토리> 등 픽사의 애니메이션이 그래왔듯, <소울>도 잊혀지는 것에 대한 감성을 건드린다.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회귀의 모험’을 펼칠 때, 영화를 보는 우리도 지금껏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깨닫는다. <소울>에서는 잘 살 자신이 없어서 삶을 살기 싫은 캐릭터와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서 삶에 매달리는 캐릭터가 만나, 살아있다는 것, 삶을 살아낸다는 것 자체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계획이 어긋난 틈새를 우연이 메꾸기 때문에, 작고 평범하게만 보이는 오늘이 어쩌면 가장 소중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모든 게 엉망일지라도


<소울>은 결코 아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어른들 중에서도 특히, 한 번쯤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울어본 이들을 위한 영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캐릭터부터, 배경, 음악까지 화면 속 분위기를 지배하는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심오한 주제를 직관적으로 녹여낸다는 것. 우주 너머의 영적인 존재이자, 꼬마 영혼들의 안내자 겸 카운슬러 ‘제리’도 그중 하나다. 캐릭터 디자인에서 파블로 피카소의 라이트 페인팅이 떠오른다. 즉흥적인 영감이 돋보이고, 빛의 잔상을 담아낸 그림처럼 오묘하고 신비롭다. 새카만 어둠 뒤로 흰 섬광이 번져나가는 배경에서는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로 유명한 로버트 헨케의 작품이 생각난다. 헨케는 랜덤한 숫자 규칙을 음악에 적용해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다. 눈과 귀로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여기에 재즈와 앰비언트, 일렉트로닉 뉴에이지처럼 다른 성향의 연주곡이 더해져 지구와 태어나기 전 세상이라는 공간의 몰입감을 자아낸다.


파블로 피카소의 라이트 페인팅 (1949), 로버트 헨케의 설치 작품 <Fragile Territories> (2020)


작년 전 세계를 뒤흔든 BLM(Black Lives Matter) 운동과 맞물려, 영화 기획과 제작 인력에도 눈길이 간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공동 연출을 맡은 캠프 파워스 감독이 밝혔듯, 제목인 <소울>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영혼을 뜻할 뿐 아니라, 재즈 음악에 담긴 정서, 그리고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정신을 담아낸다. 픽사는 문화적 감수성에서 디테일을 제대로 잡아내고자 총괄 프로듀서(키리 하트), 애니메이터들(프랭크 애브니, 몬태큐 루핀 등), 스토리 아티스트들(애프턴 코빈, 마이클 예이츠) 등 흑인 문화권에 속한 스탭과 말 그대로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캐릭터와 배경, 음악, 인력까지 촘촘히 설계된 덕에, ‘우연’이라는 키워드가 영화 속에서 빛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한번쯤은 ‘조’로 살아봤지 않나. 정세랑 소설가의 <피프티 피플> 속 구절을 조금 바꿔 빌리자면, 모든 게 엉망이라고 느껴지고 노력은 닿지 않던 때. 느리고, 느리게 나아가다가 한순간 저 멀리 퇴보하는 듯한 느낌을 참아내면서 계속 발걸음을 뗐던 시간 말이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게 내 것이 됐을 때, 상상했던 만큼 감동이 큰 적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렇게 하나를 이루고, 실망해서 또 다른 목표를 찾고, 또 다시 실망하고. 그런 우리들에게 <소울>은 말한다. 무언가에 사랑에 빠졌던 그 감정, 그 열정을 좇아도 좋고, 꼭 사랑에 빠진 적이 없더라도, 사랑이 식었더라도, 지금 그대로의 당신으로 충분하다고.





<소울(Soul)>

개봉 |  2021년 1월

감독 |  피트 닥터

출연 |  제이미 폭스, 티나 페이, 다비드 딕스 外 (목소리)

등급 |  전체 관람가

(이미지 출처: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작가의 이전글 비디오 게임 세상 속 ‘히든 피겨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