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
얼마 전 성전환 수술을 받은 육군 하사는 ‘강제 전역’으로 군인의 꿈을 포기했고, 국내 모 여대에 합격한 성전환 여성은 ‘두려움’에 입학을 포기했다.
미국의 사전 출판사 메리엄 웹스터가 2019년 ‘올해의 단어’로 ‘They’(제3의 성별을 지닌 개인)를 선정했던 만큼, 한국 사회의 보수성을 지적하는 외신 보도가 이어졌다. 특히 국가 기관인 육군 전역심사위원회의 일방적인 통보에 대해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여전히 관용이 부족한 편”이라고, 영국 BBC 방송은 “한국에는 차별금지법이 없다”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 속 만연한 차별과 부족한 관용.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적용되는 문제이지 않나 싶다. 오히려 후자가 원인으로 기능해, 전자를 결과로 촉발한 듯도 하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뺏고 뺏기는 파이 싸움이 아니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때 세상을 향한 관용이 시작되는 법이다. 영화 <헤드윅>은 그렇게 마음 한켠에 결핍이 있는 모두의 ‘구원자’ 같은 영화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 로커 헤드윅이 그린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1961년부터 무너진 1989년 이후를 배경으로, 화려하지만 비극적인 글램록 뮤지컬의 향연이 펼쳐진다. 2020년인 지금도 여전히 ‘말이 칼이 되는 시대’인데 60년 전은 오죽했겠는가. 헤드윅의 삶은 타인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경멸받고 이용당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포함해 수많은 남자에게 성추행 당하고, 성전환 수술까지 감행할 만큼 사랑했던 미군 루터에게도 버려진다.
너덜너덜하게 짓무른 상처를 치유해줄 ‘완벽한 반쪽’(Orgin of love). 애처롭게 사랑을 찾아 헤매는 헤드윅의 여정은 플라톤 『향연』에 뿌리를 둔다. 신이 내린 벌로 원래 ‘네개의 팔과 네개의 다리’을 가졌던 몸이 반으로 나뉘어져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는 것. 헤드윅은 이렇게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필연적 사랑을 노래하며 이미 온전한 자아를 매순간 외면한다.
이때 우연히 만난 토미가 헤드윅의 기구한 이야기를 듣고는 “하느님을 믿느냐”고 묻는다. 산전수전을 겪어온 헤드윅을 구원하고자 던진 질문일 거다. 헤드윅은 가만히 고민하다가, “그의 창조를 사랑하지”(I love his creation)라는 뜻밖의 말로 답한다. 그리고 토미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닌, 헤드윅 자신의 답에서 구원이 시작된다. (난 종교가 없지만) 신의 창조물에는 인간이 있고, 내가 있기에.
내가 나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출발점에서, 나는 나만의 구원자가 된다. 다시 말해, 나의 구원자는 그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이다. 두 번째 사운드트랙 <Wicked Little Town>이 스스로 구원자가 된 헤드윅이 자신에게 선사하는 자유라면, 마지막 트랙 <Midnight Radio>는 그런 헤드윅이 타인에게 제시하는 자유다. 이를 가능케 한 본질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 인간을 향한 사랑이다.
어쩌면 그게 사랑의 기원(Orgin of love)일지도 모르겠다.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
개봉 | 2017년 6월 재개봉, 2002년 8월 개봉
감독 | 존 카메론 미첼
출연 | 존 카메론 미첼, 미리암 쇼어, 마이클 피트 外
등급 | 국내 15세 관람가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