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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04. 2021

인생에서 필요 없는 것을 버리기로 했다.

감당도 못하면서 버리지도 못해서 물건을 끌어안고 사는 여자가 있다. 

쓰레기 집에서 옛 추억에 휩싸이고,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라며 거대한 고물상 같은 집과 사는 여자.

마을에서도 소문이 나 비웃음을 당하는 그녀의 장면을 보고, 나는 마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끌어안고 사는 그녀에게 공감하였다.

모든 것은 결국 쓸모가 있는데 어떻게 지금 섣불리 버리겠냐고. 버릴 수 없다고. 나라도 저럴 것이라고. 


어릴때의 다짐과 달리.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물건을 가차없이 버리게 된, 일명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나라고 처음부터 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버려야 하는 상황들은 온다.

변화를 위해서, 이동을 위해서 우리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한다. 



본격적으로 버리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 나에 대해 간략히 말하고 가자. 


나는 "일단 해두면 좋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어른들이 하면 좋다는건 죄다 했던 열정 넘치던 깡촌의 한 여고생이었다. 그런데 정신차려 보니, 초등학생 때부터 꿈꾸던 생명공학도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컴퓨터 공학과에 돌연 재학하게 된 것이다. 


때는 수능을 망친 뒤. 나는 급하게 잡았던 수의사라는 새로운 진로 희망지를 버려야 했다. 절대 재수는 안된다는 가풍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쉽지만 생명공학과로 진학하여 내 꿈을 다른 방향으로 이루리라, 생각할 때였다. 그러나 가족의 생각은 달랐다. 그때 나는 행정학과를 가거나, 취업이 잘 되는 다른 학과를 선택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 과정은 우리의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으니 간략하게 말하겠다. 나는 그때 당시에는 죽어도 행정학과를 가고 싶지 않았다. 호불호가 거의 없던 나였지만, 정말 그 길은 죽었다 깨어도 가기 싫었다. 그래서 같은 공대니까, 라는 이유로 컴퓨터 공학과를 오게 되었다. 


내 고향은 경남의 작은 군이다. 대학교는 당연히 없었고, 사교육도 거의 없어 우리의 공부는 인강과 교과서가 태반이었다. 당시 나와 어울리던 친구들은 거의 경남 또는 부산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었고, 나는 추가합격으로 운좋게 서울 순위권 끝자락 4년제 대학에 오게 되었다. 문제는, 서울에는 친구도, 지인도 없었다는 것이다. 언어만 같지, 유학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맞이한 서울 생활은 3평 고시원 쪽방에서 시작되었는데, 

우여곡절끝에 입학했던 학교는 내 생각과 너무 달랐고,

하나도 준비되어있지 않던 배경지식으로 따라가기에는 전공공부는 지나치게 어려웠다. 

같은 학과에 진학한 다른 학교 친구에게 물어보니, 유독 내가 다니던 학교가 1학년 1학기부터 전공으로 심하게 압박을 하는 곳이었다. 그 때문인지, 전공에 대한 고됨으로 함께 위로와 공감을 보내던 친구들은, 귀신같이 학교를 하나 둘 떠났다. 적성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나는 떠나지 못한 이들 중 하나였다. 

우선, 하면 좋겠지- 라는 안일하고 무책임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탓도 있었고,

학교를 그만두려 작정을 했더니 언니가 뜯어말렸다. 기본적으로 부모님의 난색도 있었지만, 언니의 발언은 우리집에서 꽤 큰 편이다. 언니는 바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와서는, 내가 결국 학교를 잘 다니겠다고 다짐하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돌아갔다. 그 일이 몇번이나 있었고, 나는 결국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약속하였었다. 


전공이 맞지 않다는 것보다, 내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들이 있었다.

이 대학을 다니는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공부를 이유로, 삶에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있었다.

결국엔 꿈을 위해, 언젠가는 보상받을 거니까. 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미루고 외면했던 내 자신이 거기 있었다. 

언니라고 해도 영원히 서울에 머무를 순 없었고, 나는 결국 다시 혼자서 잘 해나가야 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안에 있던 움츠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헤메는 아이를 발견했다. 

정해진 길이 있었고, 대강 졸업을 하고 나면 공기업에 가라는 말씀대로 준비를 하던 나는, 생각보다 자주 그 아이와 마주쳤다. 


대학교는 다양성의 시작이었다, 내게.

스스로 옷을 골라 입어야 했고, 머리를 만지고 화장을 할 수 있었다.

직접 과목을 선택하고 세부 진로를 적극적으로 골라서 열심히 미리 준비해야 한다.

누구와 어울릴지, 어떤 것을 공부할지, 무엇을 취미로 둘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선택의 기준은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어울릴 사람을 정하고, 배울 것들을 정하고, 삶의 태도를 정했다. 


시골에서는 그런 선택권이 많이 없기도 하였고, 나 또한 태평하게 대강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하던 아이였기에, 그야말로 대학은 너무 많은 선택권이 있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다양성의 바다였다. 


"일단 해두면 되겠지." 는 더이상 여기서 통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맞딱드려 당황하던 나는 결국 2학년까지만 하고 휴학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미리 적금을 들어두었던 100만원이 있어서, 부모님의 허락 없이 홀로 월세가 싸다는 지역에 지하철을 타고 내려가 계약을 하고, 방을 구해버렸다. 혹시 취소시킬까봐, 한동안 가족이랑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때늦은 사춘기 열병처럼 방황을 하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1년이 될 예정이었던 휴학은 1년반이 되었고, 복학을 한지 두달이 채 되지 않은 때 나는 자퇴를 다시 떠올렸고, 3달째에는 결국 자퇴 원서를 뽑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옷장에 내가 갖고 싶던 옷을 가득 채워보았다가 실패해서 또 한보따리를 짐으로 밖으로 내다버려야 했고, 전공에 적응을 할거라며, 또는 언젠가 배울 거라며 잔뜩 사두었던 책들도 또 잔뜩 버리게 되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던 나는 이제 밀어내기도 하고, 더이상 마음아파하기 보다는 일찍 떠나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쫓아다니던 우울증이 회복되었다. 


모든 건 필요하지 않은 것, 내가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들을 버리면서 시작되었다. 

이제 나는 그 빈자리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들을 넣는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소설로 칭찬을 받으며 월 1~3만원 정도의 소소한 부수입을 얻는다. 맛없는 음식을 참고 먹었던 나는 이제 여러가지 소스를 부으며 맛있는 파스타도 곧잘 만들게 되었고, 나만의 구수한 된장찌게나 얼큰한 김치찌게 레시피도 만들었다. 


이제 학교를 자퇴하면 늘 배우고 싶던 디자인을 배우기로 하였고, 돈을 어느정도 모은 뒤에는 워홀을 가기로 하였다. 나는 이제 내가 꿈꾸기만 하던 삶을 바로 살고 있었다. 내가 미련을 가지고 버리지 못한 것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위한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미처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게끔 속을 꽉, 막고 있던 하수구 찌꺼기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뒤늦게서야, 내가 늘 그 여자. 집에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워놔서, 그 공간에 행복은 들여놓지 못하던 여자와 닮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각하고서부터 조금씩 버리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제법 과감해져서 쓸모없는 건 애초에 사지 않는다거나, 바로 버리거나 하면서 집에 공간도 늘었다. 


내가 어설프게 하기로 한 것들,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것들을 버리고 나니

그 자리에 내가 정말로 원하던 것들, 애쓰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것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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