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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영 Jan 06. 2017

<물이 포도주가 된 것 처럼.>

_요한복음 2:1-12중 6-7절

<물이 포도주가 된 것 처럼.> 

그 집에는 돌로 만든 물 항아리가 여섯 개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각각 물 두세 동이를 담을 수 있는 항아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_요한복음 2:1-12중 6-7절


*아래 글은 오늘 묵상 본문에 대해서 전에 써봤던 소설형식의 소품입니다. 

간단하고 평면적인 성경말씀 이면의 당시 상황과 교훈을 베드로라는 주인공을 통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다소 어거지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이 상황 유추의 단서가 되었습니다.   

1. 이미 비워진 술 푸대(술 독)을 놔두고 손발 씻는 물을 담는 막 항아리를 사용하심. (6절) 

2. 거기에 물을 채워서 어떻하라고...(7절) 

3. 하인이 무슨 죄라고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시는가? (8절)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총 10편인데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신앙생활이 놀라운 유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저에겐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일상이 기적이 됩니다.- 


 ***********************************************************************

늦은 오후 강한 태양 빛이 잦아들 즈음… 호수 변 풀밭 둔덕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시몬의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하늘은 한번도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무수히 바라본 하늘이지만 매번 다른 모습으로 반겼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그러하였고, 무너져 내릴 듯 가까이 걸린 흰구름이 그러하였다. 한번도 같은 궤적을 그린 적이 없는 새들의 비행과 그것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날마다 신선했다. 계절 따라 바뀌는 나무들의 차림새와 가지에 걸린 바람들이 명랑했다. 호수에서 불어 온 바람이 풀숲을 헤집고 쪽빛 물내음을 전할 때 마다 지천으로 흐드러진 들꽃들은 서로 뒤질세라 자신의 몸을 털었다. 그 향기가 귀를 흔들 때면 잠시 눈을 감았다. 자연이 서로를 의지하며 지어내는 모든 풍경소리와 향기가 새벽녘의 고운 이슬비처럼 마음을 흠뻑 적시도록…. 

그런 후에라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상의 버거움은 여전히 중력처럼 그를 끌어 내렸다.    

시몬은 자신이 환자가 아닐까 종종 생각했다. 매일 이렇게 쓰러졌다가 그나마 자연이 그를 수습하지 않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는 환자처럼 말이다. 그를 매일 쓰러트리는 것은 다름아닌 ‘허무’란 존재였고, 그것의 증상은 공허감, 허탈감, 실망감, 패배감, 답답함, 분노, 원망 등이었다. 그는 이 병에 지독히 감염되어 있었고, 아픔을 잊어보려 근래에는 독주까지 입에 대기 시작했다. 곧잘 버틸 수 없는 한계 까지 마셔댔다. 그런 후면 꼭 내장 속의 전부를 게워 내고야 말았다. 게워낸 오물들이 자신을 괴롭히던 허무의 부스러기일 것이라 생각하며 안위했다. 하지만 잠시도 지체할 겨를이 없이 더 지독한 허무가 몰려왔다. 정작 그가 쏟아 내었던 것은 다름아닌 그 안에 숨어 있던 위선과 가식이었다. 아무리 쏟아 내어도 끝이 없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 덩어리일 따름이었다. 술 기운이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했고 비로소 그는 그 자신을 싸늘하게 지켜 볼 수 있었다.  

잘 살고 싶었다. 자신에 만족하며 가치 있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했다. 성실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남에게 크게 해 될만한 행동을 하지 않고 살았다. 인간관계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스스로 속일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는 거짓 웃음이었고,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독설과 욕망이었다. 환한 웃음에 조차 냉소하고 있는 마음은 그를 혼란 시켰다. 게다가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그런 그의 마음의 병을 부채질했다.  

  '도대체..'  


  곧 스스로 쏟아낼 질문들이 두려워 고개를 저어 버리고, 분노로 불끈 쥔 주먹을 바위를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극심한 통증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더 큰 아픔으로 덮쳐 오는 허무감이었다. 그리고 패배감이었다.  

‘여호와. 하나님...’  

그 이름은 부모님의 이름처럼 그에게 익숙한 존재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그의 이름은 마치 작아져 입을 수 없게 된 옷처럼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냥 남들이 다 그러하듯 무턱대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좋을 듯 하긴 했다. 그냥 눈 딱 감고 하나님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믿고, 기도하면 최소한 자신의 삶이 이전 보다 나아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까지 억지를 써가며 마음을 속이는 것이 언젠가부터 양심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허무’란 동굴이 그의 마음에 영역을 넓혀 갔다.  스스로 성인이라 생각한 후부터 이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허덕여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노력으로도 그 공간을 채울 수 가 없었다. 오히려 애를 쓸 수록 마음속엔 허무감이 증폭되어 갈 뿐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부터 진정이 되질 않았다. 명치가 꽉 막힌 듯 하고, 쓴 물이 계속 넘어왔다. 무의식 중에 튀어 나오는 욕지거리가 섬찟 놀라게 했다. 내리친 주먹에 피가 흐른다. 피에 비친 눈 망울이 눈물을 가득 담고 있다.  

그 때 동생 안드레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처난 주먹을 허리춤 뒤로 숨겼다. 동생은 자신과 달리 온순한 성격에다 침착했지만 현실감이 결여된 것이 늘 거슬렸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좋았지만 그것은 마땅히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했다.   

“헉. 헉… 형! 할 얘기가 있어. 다름이 아니라 요한이란 분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헉헉.”


웬만한 일로 호들갑을 떨 동생이 아니었는데 오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요한이란 분이 요단강 하류 쪽 베다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면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전한다고 해. 그는 낙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매었을 뿐이고, 먹는 것도 메뚜기와 들에서 난 꿀만 먹고 지낸대. 형! 그가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인 것 같아. 같이 가서 한번 만나보자. 응?”  

평상시 같았으면 호되게 꾸중 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음에 동생의 말이 미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동생 말대로 그가 정말 그리스도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는가! 아니라 해도 동생의 호들갑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반나절 동안 준비를 마친 후 동생 안드레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요한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3일 길을 걸어 드디어 요단강 하류 베다니 근처에서 침례를 주면서 말씀을 전하는 요한을 볼 수 있었다. 동생은 그 후 요한 선생님의 말씀에 심취해 며칠 째 밤낮으로 그에게 붙어 지냈지만 시몬은 달랐다. 몇 일이 지난 후 처음 기대와는 달리 약간 심드렁해 졌다. 무엇보다도 요한선생님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록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 말씀하셨다. 자신은 그 분 앞에 꿇어 앉아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요한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든 시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메시야이냐 아니냐 이다. 그는 본인 입으로 분명하게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 말이 내 마음 속에 찬 물을 끼얹었다. 그런 탓에 요한선생님의 설교를 들을 시간이었음에도 아직 나서지 않고 여관 방에 빈둥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 동생 안드레가 다시 허겁지겁 찾아 왔다. 

“형!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어! 그리스도를 만났다구.” 


그의 호들갑에 기회라도 잡은 듯 나무랐다. 그렇잖아도 동생의 꼬드김에 빠져 고기잡이도 팽개친 채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던 참이었다. 

“야. 그만해라. 한창 그물을 던져야 할 시간에 괜히 시간만 허비한 거 같다. 요한 선생님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 얘기하지 않았냐?” 


“형! 요한 선생님이 아니라구. 바로 ‘예수’라는 분이야. 요한 선생님이 그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셨어. 또 ‘이 분은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선 분이다. 비록 내가 먼저 태어나긴 하였지만 이 분은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다’라고도 하셨고… 우리는 호기심에 그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 나섰지. 그는 우리가 쫓는 것을 보고는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어. 그 물음에 나는 ‘선생님은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엉겁결에 물었지. 예수님께서는 흔쾌히 ‘따라 와 보아라’라고 말씀하셨어. 예수님이 우리를 그가 거처하는 곳에 데려 가셨고,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어. 형! 요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틀림 없었어. 그가 바로 우리가 찾는 그리스도라는 생각이 들어.“  

동생의 강권에 마지 못한 듯 따라 나섰다. 이번에도 사실이 아니면 동생을 단단히 혼내 줄 참이었다. 또한 내심 마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가 그리스도와 비슷한 그림자만 보았다 해도 찾아 나설 참이었다. 그만큼 시몬의 마음은 절박했다. 예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예상과 달리 그는 자신 또래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맑은 샘 같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을 통해 그의 전 존재가 자신을 투과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동시에 자신의 전 존재가 그에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그럴 리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마치 어느날 첫사랑의 열정이 그의 마음에 훅~하고 들어 앉는 것과 같았다.  

그 때 예수는 선문답 같은 얘기를 하였다.  


“당신이 요한의 아들 시몬이군요. 당신은 앞으로 ‘반석(베드로)’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이름은 ‘시몬’을 대신하여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리 싫지 않았다. 그 자신도 예수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데다 자신을 보고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주신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왜였을까? 잠깐 뿐인 만남이었지만 밑도 끝도 없이 그가 진짜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음 속의 허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말 이 후덥지근한 세상을 한 방에 식혀줄 소낙비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의 병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의 조국 이스라엘의 상황은 모든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대제사장조차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 도에 따라 임명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야바와 안나스와 같은 대제사장 들이 그러했다. 성전은 성전세와 십일조 등 각종 세 외에도 성전 세겔이라는 특별화폐를 발행하여 부당한 환전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더 이상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교통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단지 로마제국 세력의 충실한 시녀 역할을 감당할 뿐이었다.  

유대 자치정부인 산헤드린(Sanhedrin)공회*도 성전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마음 속에 이러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울분이 가득하였지만, 그 뿐이었다. 혼자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 산헤드린 공회 : 예수 당시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으로서 대제사장이 의장직을 맡았다. 산헤드린은 BC538~BC167년 유대가 페르시아와 헬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에게 조언을 하기 위해 만든 자문회가 발전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사장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후에 율법사,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 71명으로 구성되었다. 로마 정부는 산헤드린에 종교 문제와 민.형사상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고 자체 경비대를 갖출 수 있도록 허락했으므로,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에서 특히 종교 문제에 있어서는 큰 영향력을 가진 최고 재판소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사형 집행권은 없었다.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를 비롯하여 요한과 빌립, 그리고 나다나엘로 구성된 일행은 그날 이후 예수님과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고, 얼마 후 귀향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느끼는 생기로 모두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갈릴리로 돌아 온 지 3일 후 가나에서 예수님의 친척 결혼식이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리고 귀향을 같이 했던 일행을 초대했다. 저녁 어스름 무렵 도착한 잔칫집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당시 결혼 잔치는 거의 예외 없이 저녁시간에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유대사람들은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을 해가 지는 시간으로 셈하고 있었고, 결혼은 곧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의미하기에 저녁시간에 결혼식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해 있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의 경조사에 항상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팔을 벗고 나서 음식을 준비하며 여러 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친척의 결혼식이어서인지 어느 때 보다 더 분주히 손님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었다.  

그 때 하인 중의 한 명이 마리아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무슨 내용인지 마리아의 안색이 먼 발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창백해 졌다. 마리아는 급히 하인의 안내에 따라 창고에 도착하였고, 그곳에 벌어진 광경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포도주가 거의 동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큰 가죽부대 다섯 개중 네 개는 이미 말라 있었고, 남은 한 부대도 배가 홀쭉해 보이는 것이 술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인 상태였다. 예상보다 많이 참석한 혼인 하객에다 초반부터 너무 흥이 돋구어져 많이들 마신 탓이리라.  

발을 동동 구르는 하인들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도주는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다. 마지막까지 여유가 있도록 넉넉히 준비를 해야만 했다. 무슨 대책이든 세워야 했지만 모두에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한창 흥겨움에 도취되어 있는 잔칫집 분위기가 한 순간에 식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 밤중에 다른 곳에서 빌려 오기도 여의치 않은 노릇이었다.  

마리아도 한 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비워가는 술 자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과 함께 곤혹스러움이 베드로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잠시 골몰하던 마리아는 무슨 좋은 수라도 생각이 난 양 다급히 창고를 떠나 아들 예수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잠깐 할 말이 있단다. 얘야! 포도주가 다 떨어져 가는 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마리아는 아들의 특별한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감으로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주위 사람들까지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자(귀나이)’이라는 호칭이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많이 사용되는 말이긴 하지만, 마치 남의 어머니를 부르듯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씀하시는 것은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의미가 그가 한 여인의 아들로서의 사적인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공적인 삶을 시작하는 신호였음을 알 방법이 없었다.  

마리아는 선문답과도 같은 예수의 대답을 이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다시 말했다.  


“그가 하라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하세요.” 


마리아는 예수가 이 일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하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듯 했다. 그의 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잔치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한 동안 고개를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음 속에 하늘이라도 그리는 듯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마다 반복되는 습관이었다. 그 때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뭔가 지시를 받기라도 한 듯 하늘을 깊게 호흡한 후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하인들을 결례(潔禮) 항아리 곁으로 불렀다. 대문 입구 바깥쪽에 있는 손과 발을 씻는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였다. 손님들이 집안으로 들어설 때 그 통에서 물을 떠서 긴 여정에 더럽혀진 손과 발을 씻는 용도였다. 그런데 그 항아리도 손님이 많이 온 탓인지 다 비워져 있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시오.” 


하인들은 이미 올 손님은 다 온 시간에 다시 손과 발을 씻을 물을 준비하라는 예수님의 당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간이 이미 늦었고 포도주 마저 떨어진 마당에 올 손님이 아직 남아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인들은 마리아의 엄중한 부탁이 있었던 지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을 가져다가 가득 채웠다.  

그런데 이제는 무작정 요청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시오.” 


옆에서 되어 가는 일을 지켜보고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인들도 물을 떠 담던 바가지를 손에 든 채 그대로 얼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그 물이 포도주라도 된단 말인가?’ 

순간 베드로에게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여전히 겁먹은 하인들의 태도를 보아선 항아리에 담겨있는 물은 그대로 임이 분명했다. 억지 같은 상황이었다. 결례 항아리 안의 더러운 물을 떠서 포도주 대신 연회장에게 갖다 준다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었다. 어느 하인이든 두들겨 맞고 쫓겨 날 것이 뻔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따르면 예수님의 요청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어색한 침묵의 순간을 뚫고 한 명의 하인이 앞으로 나섰다. 늘 꿈꾸듯 깊은 눈을 가진 하인이었다. 그의 붉은 얼굴 빛에서 성실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예. 예수님 말씀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주저함 없이 항아리의 물을 잔에 떠서 먼저 연회장(宴會長)에게 가져다 올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나머지 하인들에게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지만, 정작 연회장에게 잔을 올린 그 하인과 예수님, 그리고 마리아의 얼굴은 잔잔하였다.  

포도주가 떨어져 가는 상황을 대충 눈치채고 있던 연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새로운 포도주를 조심스럽게 음미했다. 이내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는 신랑을 추켜 세우며 말했다.  


“잔칫집 주인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손님들이 취한 후에 좋지 않은 것을 내오기 마련인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갖고 있었군요. 맛이 참 좋은 포도주입니다 그려..” 


그제야 나머지 하인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고, 혼인잔치는 새벽녘까지 어느 때보다도 흥겹게 진행되어 갔다.  

당시 아무도 이 일의 내막을 알지 못하였지만 하인들과 제자들은 이 일이 이루어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인들의 입을 통해 이 일이 삽시간에 퍼지게 되어 ‘가나’라는 조그마한 촌에서 이루어진 일이 후대에도 계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 날 잔치의 왁자지껄한 유쾌함은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실을 아는 하인들과 그 외 몇몇이 누린 비밀스러운 기쁨에 비하면 왜소했다. 

잔치를 마치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 옆의 큰 바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멀리 구름을 밟고 하늘에 떠 있는 눈 덥힌 헬몬산의 설경과 바위를 둘러 있는 노란 들꽃들이 싱그러운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베드로에겐 쉼보다 혼인잔치 때에 그가 행하신 기적사건에 대한 질문이 급했다.  

“예수님!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려면 원래 있던 빈 포도주 부대를 이용하면 되었을 것을 왜 굳이 손과 발을 씻는 항아리를 사용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완전한 기적을 의도하기 위해 술 부대가 아닌 빈 물독을 이용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만...” 

호수 건너편으로부터 시선을 거둬들인 예수님이 마치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말한 이유도 없진 않네만 굳이 그 항아리를 이용한 이유는 따로 있네. 그 항아리 속의 물은 원래 외면의 더러움을 씻는 용도가 아닌가? 그 항아리를 이용한 것은 바로 그 항아리의 물의 용도처럼 내가 이 땅에 오기 전 사람들의 종교생활은 끊임없이 ‘씻는 종교’ 였음을 보여주고자 했네. 그리고, 나를 통해 생명을 얻은 이후의 삶은 ‘마시는 종교’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항아리 속의 씻는 물이 바뀌어 마시는 포도주가 된 것처럼 말일세.” 

“음.. 씻는 종교라고요? 무슨 말씀인지…” 


씻는 종교, 마시는 종교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묵직한 돌이 들어 앉은 듯 먹먹했다.   

“잘 들어 보게나. 그 항아리가 상징하는 ‘씻는 종교’란 자신 안의 더러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없이 종교적인 행위와 형식적인 회개의 절차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것을 말하네. 사람들은 그런 행위와 절차를 통해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것은 명백히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세. 마음속으로 잠시 스스로 위안을 삼고, 마음에 거짓 평안을 얻을 뿐이지.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회 칠한 무덤*일 뿐이네.” 


  *예수님이 회 칠한 무덤을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관이 다 차고 나면 빈 굴에 들어가 잠을 자곤 하였다. 그런데 여행객들은 현지 사정에 밝지 않으므로 역시 굴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무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무덤임을 표시하기 위해 밤에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굴 입구에 흰색 회 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겉모양과 달리 그 굴은 각종 더러움이 가득 차 있는 무덤일 뿐이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마음속에 각종 더러운 생각과 의도들을 숨긴 채 종교적 의식과 절차로 끊임없이 씻고 있는 종교인의 모습을 책망하시는 것이었다.  

회 칠한 무덤이라… 직접적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속사람이 들켜진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렇게 씻어 내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내면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지속적으로 경건의 모양이라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는가?  


* 바리새인 :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파는 가장 큰 유대 종파를 이루던 집단이다. ‘바리새’는 ‘분리된 자’라는 의미로 BC33년 이후 유대가 헬라의 지배를 받을 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헬레니즘과 분리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와 마귀의 존재, 죽음 이후의 상급과 징벌이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경건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으로 행동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았으므로 예수께 책망을 받았다.  


*서기관 : 기록된 율법을 보존하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법을 관리하며 백성에게 가르치는 사람들로, 율법사라고도 하며 랍비(선생)라고 부른다. 성경 말씀을 학문적으로 발전시켰지만 형식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는 것,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모습 때문에 예수님에게 비난을 받았다. 

“예수님! 저는 마음 속으로 무엇을 품든 그것이 말이나 행위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들킨 마음을 변명하며 질문했다.  

“그렇지 않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 여자를 간음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네. 육신을 입고 있는 인간이기에 생각이 스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것을 붙들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은 행위로 드러난 것과 동일한 죄인 것이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죄의 성립은 사람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이 어떠한가도 중요한 기준이지. 이것이 세상법과 하나님의 법과의 차이일세.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마음속의 생각이야 어떠하든 행동으로 죄가 나타나지만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는 태도로 사는 사람이 많네. 실제 범죄가 성립될 만한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든 자신들은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네.” 

예수님은 마치 말귀를 더디 알아 듣는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손짓을 많이 사용했다. 그의 노력 덕인지 어려운 말에는 도통 둔감한 베드로였지만, 포도주가 기분 좋게 온 몸에 스며들 듯 예수님의 말씀이 스며들었다. 그가 굳이 손과 발을 씻는 물 항아리를 이용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다시 말하면 ‘씻는 종교’란 자신의 내면의 모습과 관계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사람의 의를 결정하는 종교를 말하네. 그러나, 포도주가 상징하는 ‘마시는 종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마치 술이 몸에 들어와 자신의 몸을 장악하여 그것이 술기운으로 드러나듯 말씀이 몸에 스며들어 말씀에 취해 말씀 기운이 펄펄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규제나 억지에 의해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자발적인 행동이 된다는 것이지.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되는 하나의 규범으로 여길 때는 힘들고 피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결국 누구나 예외 없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취한다면 세상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이 하는 모양 마냥 말씀기운으로 선포하고, 누려야 할 기쁨의 동산인 것이네. 이런 사람을 바로 하나님의 영(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말하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베드로는 자신이 계속 실패했던 원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규범이었지만, 내면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았기에 힘들었고, 결국은 실패를 거듭했던 것이었다. 머리가 끄덕여 졌다.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말씀은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바로 말씀을 마셔 그 기운에 취해야 할 대상이네. 그리고 마음에 그 말씀이 흠뻑 적셔져서 그 기운이 말과 행동에 드러날 때 그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네. 이것이 바로 나를 통해 누릴 ‘은혜의 힘'이네.”   

예수님의 말씀은 절정에 다다를 때 늘 그러하듯 억양과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따라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도, 추상적인 것도 아니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면서 성도의 삶 가운데 그 말씀이 실재가 되게 하면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일터가 되는 것이지. 그런 사람의 삶은 바로 자연스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기적의 현장이 되는 것이네.” 

“예수님! 그런데 너도 나도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삶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다른 것 같습니다. 뭐.. 다른 사람은 둘째치고 저부터도 그렇고요.” 

“그렇네. 나도 작금의 현실이 참으로 마음 아프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조차 말씀에 취하는 대신 세상의 말들에 취하고, 물질에 취해서 그 기운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지. 말씀은 겨우 독주 잔 크기에 한 잔 마시고는, 세상의 말들은 돌아다니며 대접째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는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세상의 가치에 취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끊임없이 마시게나. 그리고 포도주에 취하듯이 그 말씀에 취하게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서 하나님의 소원이 곧 자신의 소원과 동일해 질 것이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역동적인 활력과 기쁨이 그의 삶에 충만하게 되지. 때론 어려움과 고통의 환경이 여전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충만히 임재해 계시면 그것들은 그의 삶에 선 순환의 재료로 녹아들 것이네. 하나님은 때때로 그것을 의도하기 위해 성도들 삶 가운데 장애물을 허락하기도 하지. 그렇게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끊임없이 닮아 가는 과정이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의 삶의 모습인 것이네. “ 

예수님의 음성은 늦은 봄날의 이슬비처럼 마음을 빈틈없이 적셔갔고, 갈릴리 호수 면에는 한 떼의 물고기들이 물에 젖은 금화처럼 반짝반짝 뛰고 있었다. 베드로의 마음도 그렇게 뛰고 있었다.  


‘오! 예수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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