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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영 Sep 07. 2016

[새로운 피조물의 기쁨 新造人的喜乐]

고린도후서 5:11-21


[새로운 피조물의 기쁨 新造人的喜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_고린도후서 5:11-21중 17절


[묵상]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가장 선진적인 그리스 문화의 교육을 받고,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며 고명한 율법박사(律法博士) 가말리엘의 제자였다. 

오늘 날로 쉽게 말하자면 하버드 박사급 정도 되는데다가 지도교수가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대학자가 되는 셈이다.

또한 바울은 종교적 열심이 대단한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는데,

그가 지금까지 갖춘 지식으로 볼 때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판단하고 그를 따른 다는 것은 사술과 다름없는 미신이고, 사람들의 정신을 좀 먹는 이단행위나 다름없었다. 

알고 있는 바를 삶에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울은 걱정하는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이단 사술에 사로잡힌 그리스도 교도들을 계몽하고 주모자들을 잡아들이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신실한 스데반이 반대자들에게 돌로 맞아 죽는 순교 현장에도 그들의 옷을 맡고 있었지 않았는가. (행 7:58절)


바로 이런 일을 위해 다메섹으로 길을 가던 바울은 환상 중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대격변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새로운 바울이 되었는데 그가 그 이후 보인 삶의 결과물이 그 사실을 보증한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족치고 죽음으로 내 몰았던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

이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다가 결국 로마 황제에게 순교를 당하는 상황에 까지 이른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의 최대의 전도자가 되었고, 또한 최대의 신학자였으며, 오늘의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

기독교 신학은 그에 의해서 틀이 잡혔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가 없다.


그가 이렇게 180% 뒤집어진 자신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것이 이해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17절)


새로운 피조물이란 물리적 특성까지 완전히 바뀐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이를 두고 중생(重生)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포장에 해당하는 장막(외형)만 유지하고 있을 뿐 그의 삶의 가치관, 삶의 방식, 그에 따른 삶의 결과물이 완전히 바뀐다. 

예수님을 만난 자에게는 바울이 겪었던 삶의 격변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모든 일이 가능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다. (14절a)

그 사랑이 우리를 '이전 것'에서 끌어내어 '새로운 피조물'로 바꾼다. (17절)

그 사랑은 한 사람(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게 한 사랑이다. (14절b)

그렇게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살아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다. (15절)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전제조건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부터 가능해 진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9-10)


이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인데,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삶의 본질이 바뀐 자의 삶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는 특성을 갖는다. (18-20절)

또 하나님과의 화목은 필수적으로 인간관계의 화목으로 연결된다. (20,21절)


그렇게 새로운 피조물된 자의 삶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순환 상승 곡선을 그린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


이 '새로운 피조물'의 로직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자(나, 성도)에게 예외 없이

-이뤄질 수 있음이,

-이뤄져야 함이,

-이뤄지고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반대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효력을 내고 있지 못한 성도의 삶은 얼마나 희한한 사건이며 안타까운 인생인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고 있다 하면서 세상의 가치관들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또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같은 본문 다른 묵상 : http://blog.naver.com/zanrong/185071901>


[기도]

주님! 저를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에 마땅한 삶의 열매가 있도록 축복하소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기쁨이 육체로서의 삶 가운데 넘치게 하소서. 


[오늘-하루]

*오늘도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루!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생생한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하루!!


**************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若有人在基督裏,他就是新造的人,旧事已过,都变成新的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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