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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영 Apr 12. 2019

혁신의 시작은 현미경이 아니라 회의탁자였다

[묵상독서171차]


2004년 무렵, 지인이 근무하고 있는 베이징의 HP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놀라웠던 것은 직원들의 고정석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직원들은 출근 당일 빈자리를 찾아 근무를 하고 빈 회의실을 이용해 미팅을 했다. 

이를 개방형 오피스라 하고 한 때 근무 환경이 생산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에 힘입어 유행했다. 

실제로 HP의 생산성이 올랐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실적이 계속 하락했다)


실제로 한 광고대행사는 직원들이 책상과 칸막이를 모두 없앤 '경계 없는' 사무실과 개인 사무실 두 환경 하에서 근무하는 실험을 했다.     

직원들은 정해진 자리가 없고, 그날그날의 프로젝트에 따라 이합집산했다. 

이 실험은 엄청난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직원들이 그런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개방형 오피스에 모티브를 준 예가 MIT의 전설적 혁신의 아이콘은 '빌딩 20'이다. 

무질서와 자율이 도리어 성과의 산실이 된 대표적인 예이다. 

1943년 6개월 시한부로 임시로 뚝딱 지어진 이 건물은 생명을 연장해 1998년 철거되기 전까지 55년 동안 아홉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미국 기초과학의 토대를 닦는 산실이 되었다. 

(이 건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 참조 : http://zanrong.blog.me/221388528438)


단순 개방형 오피스와 빌딩 20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오픈이 문제가 아니라 자율성과 융합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빌딩 20에는 분야에 관계없이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와 대학원생들의 실험, 여러 학문 분야 간의 연구센터가 혼재했다. 

언어학자인 놈 촘스키의 사무실 옆에 ROTC 학생회실이 붙어있는 식이었다. 

공간 배치에 전혀 규칙이 없었고, 애초에 값싼 재료로 얼렁뚱땅 지은 탓에 필요에 따라 천장을 뚫든 벽면을 뜯어 확장하든 학교 측은 신경 쓰지 않았다. 

수도, 전기, 전화선이 모두 복도 천정에 버팀쇠로 고정된 채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필요한 선이 있으면 바로 끌어다 마음대로 사용했다. 


빌딩 20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예로 2007년 1월 마이크로소프트가 지은 '빌딩 99'가 있다. 

직원들은 필요에 따라 벽을 쉽게 재배치할 수 있고, 넓은 상황실에는 개인 작업 공간, 회의 탁자, 소파 등이 있어서 급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이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영감이 떠오르면 벽에 재빨리 스케치할 수 있도록 특수 벽면과 필기구를 배치했다. 

복합공간과 상황실에서 직원들은 유동적 네크워크를 형성하고 집합적 몰입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만남의 공간이 생산성과 혁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설계자들은 작업(근무) 공간, 거주 공간, 도시 공간 디자인에 골몰한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공유 오피스도 기획 단계에 이런 장점을 고려했다.


그런데 이게 어디 '하드웨어적 공간(외부 공간)'만 해당될까?

폭넓은 인간관계 공간을 통해 '정보의 넘침(information spillover)'을 공유하는 것.

양질의 독서 공간을 통해 다양한 지식의 입력과 충돌을 만들어 내는 것.

깊은 묵상 공간을 통해 내 안의 생산적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것.

효과적인 기록 공간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하는 것 등 '소프트웨어적 공간(내부 공간)'도 생산성 향상을 위해 마땅히 병행해야 한다.  


벽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라 벽을 움직여야 하고, 그전에 먼저 마음의 벽부터 허물고 볼 일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고, 부대껴야 한다. 

혁신의 시작은 현미경이 아니라 회의 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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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스티븐 존슨/한국경제신문)를 읽고, 『묵상 글쓰기 방식』으로 쓴 글입니다. 

책의 주장과 다소 다를 수 있으며, 제 생각이 다수 첨가됐음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디어 #혁신 #변화 #인접 가능성 #창의성 #스티븐 존슨 # 이찬영 #아침공부 #묵상 독서


1부 인접 가능성 (1~33쪽)

2부 유동적 네트워크(자유로운 공간에서 넘치는 정보를 공유하기) (34~80쪽)


write by 기록과 미래연구소, 이찬영 (zanr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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