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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현 Mar 04. 2024

인류애; 철학의 이유

인간은 죽는다. 어떻게 살아도 죽는데 약하다는 이유로 착취 당하고, 맞아 죽는 세상이 잔혹해서 자연의 약육강식을 버리고 약자를 지키는 시스템을 만든다. 강자가 함부로 약자를 착취하고 죽일 수 없는 세상. 연민과 인류애가 가득한 세상.


그런데 어떤 철할적 사상도 사람들이 타락해서 그 뜻이 온전히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시스템을 업데이트 하고 유지 관리해야 한다.


질서를 수호한다. 모든 것은 인류의 번영과 문명의 발전을 위하여


그러므로 영생은 죽음에서 비롯되는 인류애를 저버리고 모든 사람을 타락하게 만들기 때문에 반드시 규제해야 한다.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는 계속해서 사랑을 강조하며 인류를 생각하고 죽음으로 헌신했다. 예수의 속성으로 철학의 이유를 다해야 한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정해진 죽음 앞에서 평생을 헤매었다. 27세 23년 3월 13일 결국,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하며 살지 정할 수 있었다.


이 질문에 아주 작은 틈도 없이 마음이 꽉 차서 당당하게 말할 만한 답을 찹았다. 교회를 다닌지 5년째, 모든 학생이 학교를 다닌다고 만점을 받지 못하듯, 모든 기독교인이 교회를 다닌다고 신앙이 깊지 못했다. 처음에는 대중과 나눠진 기독교인들이 모두가 신앙이 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별뜻없이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 그렇듯 태어나보니 모태신앙인 사람들은 습관적인 행동들에 의문을 갖기 어려웠을 것 같다. 이 말은 모태신앙 기독교인들에 대한 모독이 아니다. 이해이며, 변호고, 내가 그들을 몇 년간 이해하지 못하고 화냈던 이유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한다.


지금 와서 이해를 했지만 처음에는 괜히 나혼자 이중성이라고 생각하며 역겨워했다. 이제야 이해하고 간다. 선택해서 깨달음을 구하려는 자와 그냥 소속된 사람의 차이다.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에 있다고 부유하지 않는 것처럼 깨달은 소수가 봉사하고 희생하면 된다.


아! 모든 모태 신앙인들이 이중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다. 일반 신도가 사역을 하고 안하고의 차이도 신앙심과는 관계가 없었다. 목회자들도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처음 만난 목사님은 신앙심이 깊었고, 젊은 나이에 아내와 두 자녀를 두고 암투병도 하셨던, 그래서 실존주의자가 된 분이었다. 내게 “모든 것을 예수의 속성으로 생각해봐”라고 몇 년 전에 말씀해주셨는데, 최근에 우연히 철학의 뿌리로 다시 돌아가던 중에 깨달음을 얻었다. ‘철학의 뿌리 인류애, 어라? 인류애. 뭐랑 많이 비슷한데 예수? 그러면서도 사람의 타락은 항상 존재하고...’ 생각은 길게 길게 이어져 마침내 완성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처럼 야고보서의 말처럼 깨달은 사람이 희생하고 행동하면 그뿐이지.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답을 얻은 것 만으로도 모든 것을 보상 받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모든 것이 밝고 명쾌하니까. 드디어 거침없이 움직일 수 있다.


드디어 탐욕이 아니고 돈과 권력, 지식과 지혜가 필요한 이유를 마주했다.


신이 성서를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미 다주셨다. 두려워 말라. 행동하라.


신이 없고 이게 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약자를 향한 따뜻함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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