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 아라카와구 도덴 아라카와선(1)
이 시리즈의 4편 ‘도쿄의 하루는 센토에서 끝난다’ 편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친구 B는 온센 마니아인 만큼 스탬프 마니아이기도 하다. 우리 동료들 중 가장 먼저 스탬프장을 사서 도쿄 시내를 다니며 덴샤 역에서, 또는 관광지에서 스탬프를 모았고, 이곳에 지내는 1년 반 동안 소중한 기억을 남길 수 있다는 걸 깨달은 나를 포함한 나머지 동료들은 그녀를 따라 스탬프장을 사고 스탬프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은 ‘스탬프의 나라’라고도 하지 않는가. 어딜 가든 스탬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도쿄에 다니는 교통수단을 운영하는 은행잎 모양의 마크를 한 도에이(都営,とえい)에서 운영하는 스탬프가 우리가 처음 발견하고 열심히 찍기 시작한 스탬프지만, 일본에서 가장 큰 철도 회사인 JR에서도 거의 모든 역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찍을 수 있도록 스탬프를 구비하고 있다. 이 스탬프들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온라인으로 모으는 것도 가능하다. 어딘가 외출하거나 놀러 갈 때마다 그 지역의 스탬프를 모을 수 있는 셈인데, 우리 같은 장기 체류자들에게 아주 재미있는 놀이이자 기록이 되는 것이다.
도에이(TOEI) 애플리케이션(이하 어플)에는 도에이에서 운영하는 덴샤 및 버스 노선의 운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 역에서 QR코드를 통해 어플 내 온라인 스탬프를 모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스탬프를 모으는 데만 이 어플을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어플 내 도에이 운영 노선 중에 노선을 나타내는 마크가 분홍색 벚꽃 모양인 노선을 발견했다. '도덴'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노선은 '도덴 아라카와선(都電荒川線)'으로 노면전차, 즉 트램이 다니는 노선이었다.
몇 달 전 B는 가족들이 놀러와 도쿄와 근교를 가족들과 여행했었는데, B의 어머니께서 "도쿄에 트램이 다닌다던데?"라고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그 말에 B는 "에이, 무슨 트램이야~" 하고 그럴 리가 없으며 엄마가 무언갈 착각했나보다 하고 넘겼다고. 그런데 사실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그 트램이 바로 이 도덴 아라카와선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기대감이 증폭된 우리는 이 트램을 타러 가야겠다고, 그리고 트램 역마다 있을 스탬프를 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찾아보니 노선의 마크가 벚꽃 모양을 하고 있는 만큼 아라카와선이 다니는 아라카와구에는 벚꽃을 보기 좋은 장소들이 몇 군데 있었고, 트램이 지나는 선로에 벚나무가 있어 벚꽃을 배경으로 트램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역도 있었다. 도쿄의 벚꽃 예보상 25일즈음이 만개라고 하니, 그 주중에 날씨가 좋은 날 트램 스탬프와 벚꽃 사냥을 하러 나서기로 한다.
2026. 03. 22.
벚꽃 주간의 도쿄 날씨는 온통 흐림과 비 소식이었다. 일본에 봄비가 자주 온다고는 들었지만, 올해는 유난히 날씨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하다. 어쩔 수 없이 그중에 오전에라도 맑음 표시가 떠 있는 3월 22일에 우린 트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어질 시리즈에서 소개하겠지만, 도쿄에는 벚꽃 주간에 가보아야 할 곳들이 아주 많기에.
트램은 도로 위를 자동차, 보행자와 함께 공유하기 때문에, 도로 위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 전용 선로가 있는 덴샤와는 달리 교차로에서는 신호도 지켜야 하고, 보행자 안전을 우선시해야 하고, 그 밖에도 도로 위의 여러 변수에 의해 감속하기 때문에 덴샤보다 달리는 속도가 느리다. 열차 자체도 덴샤보다 짧으며, 정류장 사이의 간격이 촘촘하고 도로 위를 천천히 이동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버스에 가까운 교통수단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우리가 오늘 타는 이 도덴 아라카와선은 정류장, 즉 정차하는 역이 총 30개이며 1번 역에서 30번 역까지 이동하는 데 총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역과 역 사이 간격이 짧아 한 시간이면 전체 노선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30번 역인 와세다(早稲田) 역에서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와세다 역까지 가기 위해 동네 역에서 와세다 역까지 가는 덴샤를 이용했고, 나의 정기권은 오늘도 이렇게 알차게 제 쓰임을 발휘했다.
B와 함께 와세다 역에 도착하여 트램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은 완연한 대학가의 모습이었다. 트램은 도로 위의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덴샤 역과 트램 역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조금 걸어가야만 했기에, 와세다 대학이 위치한 와세다 역의 풍경도 둘러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짧은 산책 끝에 트램 와세다 역에 도착. 실제로 트램 정류장에 와 보니 트램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어느 정도 낭만과 상징으로 남은 교통수단이리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을 아주 빗나갔다. 트램은 이곳 주민들에게 정말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줄지어 선 곳에 우리도 줄을 서기 전에, 우리는 오늘 트램 여행의 본 목적인 스탬프를 먼저 찍어야 했다. 그간 덴샤 역에서 스탬프를 찍으려면 먼저 개찰구 부근에서 스탬프를 매의 눈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출구가 여러 개이거나 여러 노선이 지나가는 복잡한 역의 경우 스탬프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워 결국 역무원에게 물어 스탬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숱하게 경험해 온 우리는, 트램의 경우 역 규모가 상대적으로 아주 작아 스탬프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같은 곳을 계속해서 둘러보아도 스탬프가 보이지를 않는다. 게시판에 붙어있는 도에이 어플 내 온라인 스탬프를 찍는 QR코드만 있을 뿐이다. 경험상, QR코드가 있으면 보통 오프라인 실물 스탬프도 그 부근에 같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스탬프나 인주, 그것들을 둘 만한 곳조차 보이지 않는다.
역을 몇 번이고 둘러본 우리는 깨달았다. 도덴 아라카와선을 타려면 트램에 직접 올라타서 교통카드를 찍거나 기관사님께 직접 현금을 내면 된다. 즉, 역에서 티켓을 발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데 이 말은 곧 역에 상주하는 역무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무원이 없으면 역마다 비치되는 스탬프를 관리할 사람도 없다. 결국 트램 역에는 역무원이 없기 때문에 스탬프도 없는 것이다.
이럴 수가. 트램 여행을 하며 30개의 스탬프를 찍을 생각으로 오늘을 위해 새 스탬프장도 준비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이 우린 QR코드로 어플 내 온라인 스탬프를 찍고 트램에 올라탔다. 와세다 역의 스탬프에는 와세다 대학의 시계탑과 학사모를 쓴 학생들, 그리고 트램이 담겨있다. 온라인 스탬프의 모양을 보니 왠지 실제 스탬프를 종이에 찍은 것을 스캔한 것처럼 보였는데, 아무래도 예전에는 오프라인 스탬프도 있었다가 이제는 관리 문제로 없는 모양이다.
도덴 아라카와선은 보통 거리비례로 요금이 계산되는 덴샤와 다르게 얼만큼 가는지에 상관없이 한 번 탑승하는 요금이 160엔, 그리고 하루 무제한 이용권이 400엔이다. 우리는 역마다 내려 30개 역의 스탬프를 오늘 다 모을 생각으로 트램을 타는 것이기 때문에, 와세다 역에서 트램에 올라타 400엔을 내고 무제한 이용권을 구매했다. 이 또한 트램에 타서 기관사님께 일일권을 구매하겠다(一日券お願いします)고 말씀드리고, 현금 또는 교통카드로 요금을 결제하면 된다.
트램에 올라타면 내부는 더욱 버스 같은 모습이다. 좌석들과 손잡이, 하차할 때 누르는 벨, 그리고 승차문과 하차문이 앞뒤로 따로 있는 것까지. 우린 스탬프를 또 찍어야 하므로 바로 다음 역에 내렸다. 다음 역은 29번 역인 오모카게바시(面影橋). QR코드를 스캔하여 온라인 스탬프를 찍고, 우리는 다시 탑승 줄에 서서 다음 트램을 기다린다. 내리자마자 다시 탑승 줄에 서는 모습이라니. 오늘 꼭 30개의 스탬프를 다 모으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오직 스탬프만을 찍기 위한 하차와 승차. 이 상황이 좀 웃겨서 웃음이 났다.
도덴 아라카와 트램의 배차 간격은 6분 정도이다. 다만 도로의 규칙에 따르느라 종종 감속하기도 하는 트램은 딱 6분마다 맞추어 오는 것은 아니라, 서울의 지하철이나 이곳의 덴샤처럼 트램이 앞 정류장들 어디쯤 와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전자 안내판이 역마다 설치되어 있다. 그렇게 우린 5분가량을 기다렸다가 트램에 다시 승차했는데, 그새 길어진 줄에 트램에 탑승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이미 탑승해 있던 승객들과 우리와 같이 29번 역에서 탑승한 승객들까지 트램을 어느새 꽉 채우고 있었다.
우린 다음 역에서 당연하게도 온라인 스탬프를 찍기 위해 또 내렸어야 했는데, 승객들은 많고 트램과 트램 역 사이는 생각보다 짧아서 하차 벨을 누를 타이밍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많은 승객들 틈에서 '내릴게요!'를 외치는 것도, 민폐 끼치기를 극도로 꺼리는 이곳에서 도무지 용기 내어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하차 문은 열리지 않고 승차 문만 열려 우린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어떡하지? QR코드를 찍어야 하는데..!
그때, 내 눈에 QR코드가 들어왔다. 물론 우리는 트램 안에 있지만, QR코드야 카메라로 찍으면 되는데 유리창 너머로 스캔하는 것도 되지 않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급히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줌인을 시작했다. 확대해서 QR코드 쪽으로 카메라를 가져다 대니 인식 성공! 즉, 내리지 않고 온라인 스탬프를 찍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파악한 나는 신이 나서 B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그녀도 서둘러 카메라를 켜 스탬프 QR코드 스캔에 성공했다. 우리는 뿌듯함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빵 터졌다. 사람이 너무 많아 와하하 웃을 순 없고 둘이서 눈을 마주치고 음소거로 웃다가, 28번 역인 가쿠슈인시타(学習院下)에서 내려 참아왔던 웃음을 터뜨려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내려서 B와 이야기 나누다가 문득 깨달았다. 실물 스탬프가 없고, 도로 위를 달리기 때문에 플랫폼과 개찰구의 구분이 따로 없어 개찰구 쪽까지 가지 않아도 트램 안에서 온라인 스탬프 QR코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면 모든 역에서 하차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요령을 터득한 우리는 30개 역에 모두 내리지 않아도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앞으로는 들르고 싶었던 장소들이 있는 역에만 내리고 나머지 역들은 트램 안에서 스탬프를 찍기로 한다.
그렇게 우리는 트램 안에서 열심히 유리창 밖의 QR코드를 찍으며 27번 키시보진마에(鬼子母神前) 역, 26번 도덴조시가야(都電雑司ヶ谷) 역을 지나 25번 히가시이케부쿠로욘초메(東池袋四丁目) 역에 내렸다. 여기 내린 이유는 소바와 튀김 정식을 파는 가게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둔 가게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시민들이 지내는 일상에 트램이 함께 어우러지는, 유럽에서나 볼 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식당에선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소바와 담백한 튀김을 맛있게 먹고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스탬프도 벌써 6개나 모았겠다, 이미 이제껏 많아야 두세 개를 찍던 하루치 스탬프의 두 배도 넘게 모았음에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를 수집하는 즐거움, 퀘스트를 깨 나가는 즐거움이라고 할까나.
다음 목적지는 17번 역인 아스카야마(飛鳥山)이다. 도덴 아라카와선은 노선 마크가 벚꽃 모양인 것처럼 '도쿄 사쿠라 트램'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 아스카야마에 있는 공원이 벚꽃놀이 장소로 유명하다. 벚꽃을 보기 위해 우린 아스카야마 공원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25번 역에서 17번 역까지 한 번도 내리지 않고 스탬프를 모두 찍을 수 있었냐고? 대답을 하자면 그렇지 않다. 우선 하차 벨이 눌리지 않았는데 그 역에 승차할 승객까지 없다면, 으레 버스들이 그렇듯 트램은 정차하지 않고 그냥 역을 지나간다. 그러면 우린 잽싸게 QR코드를 찾아 카메라로 찍어야 하는데, 정차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트램 안에서 그 코드를 순간적으로 제대로 포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 번은 우리가 벨을 눌러 내리기도 하고, 또는 그럴 여유도 없이 지나가버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스탬프를 찍기로 하고 지나친 역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렇게 했기에 서로 외관이 다른 각양각색의 트램을 다양하게 타 보고, 예쁜 철로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종이에 스탬프를 찍으러 새 스탬프장을 준비해 왔지만 온라인 스탬프만 찍을 수 있었으며, 역마다 내려서 스탬프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트램 안에서 내리지 않고도 각 역의 스탬프를 찍을 수 있었다. 언제나 삶이 그렇듯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열심히 계획을 짜 놓아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 그러나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재미있는 일과 기억에 남는 추억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스카야마 공원에서 우린 예쁜 벚꽃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꽃놀이가 이 트램 여행의 중심이자 목적이었는데.
이쯤되면 당신도 알 지도 모른다. 역시나 예보와 계획을 빗나가 벚꽃은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하는 단계라 꽃놀이를 즐길 타이밍은 아니었고, 공원 자체는 물론 좋았지만 오늘 하루 우리의 하이라이트를 꼽아본다면 그 장면 안에 아스카야마 공원은 사실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 하이라이트를 채우는 장면들은 무엇이었을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기에 더 선명하게 남은 순간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크게 다가온 즐거움들. 아마도 이 날은 계획이 아니라 어긋난 순간들로 완성된 하루였던 것 같다.
그 이야기들을, 다음 글에서 이 이야기의 후편으로 이어서 남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