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한복판에서 소음이 사라지는 순간

9 - 시부야구 메이지 신궁

by 히요쿄


3월 덴샤 정기권을 끊으면서 도쿄 곳곳을 한 달 동안 샅샅이 누비기 위해 나름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두었다. 매일 크게 해야 할 일이 없는 방학의 3월인지라 그날그날의 기분과 날씨에 따라 버킷리스트에 적힌 장소들을 보고 어디에 갈지 정하곤 한다. 봄이 꿈틀대기 시작하는 3월이기에, 버킷리스트엔 주로 공원 같은 장소들이 많다.


원래 그 버킷리스트에 있던 우에노 공원이나 스미다 공원에 가볼까 하던 와중, 날씨 어플을 통해 오늘은 최고 기온 16도의 구름 없이 맑은 날이라는 걸 파악하고는 문득 머릿속에 메이지 신궁이 떠올랐다. 버킷리스트 안에 있던 장소는 아니지만 날씨가 좋을 때 꼭 제대로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나에게는 일본인 친구가 두 명 있다. 여기에 와서 반년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만, 사실 살고 있는 곳은 유학생 기숙사라 일본인과 마주할 일이 많이 없고, 수업 시간에 만나는 일본인 학생들이 있긴 하다만 수업 시간 외에는 만나지 않으므로 딱히 친구 관계로 발전시킬 만한 여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학생들은 나보다 많게는 열 살 어린 만 18세, 19세의 아이들이라 어떤 여건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가까워지기엔 세대의 장벽이 그것을 어렵게 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 두 명의 일본인 친구는 이곳에 와서 사귄 친구들이 아니라, 실은 3년 전 겨울 도쿄에 여행을 왔을 때 알게 된 친구들이다. 당시 일본어를 잘 못하던 나는 길을 잃은 것과 같은 상황에 놓였고, 바로 옆에 있던 그들에게 짧은 일본어로 길을 묻다가, 내가 가려던 목적지인 메이지 신궁이 이미 문을 닫은 것을 알게 되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을 나에게 그들은 친절히 관심을 가져 주었으며, 우린 함께 내가 원래 메이지 신궁에 다녀와서 가려고 했던 카페로 가게 되었다.


대화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가며 이어졌다. 정확한 대화의 내용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일련의 대화를 통해 삶을 대하는 가치관이나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서로 느꼈고, 그날 저녁 식사까지 함께 하며 우린 친구가 되었다. 그 이후 도쿄에 반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현재 유학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기 위해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두 친구들과 종종 연락했던 것이 나의 일본어 공부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그해 여름에는 다시 도쿄에 여행을 가서 그 친구들과 한 끼 식사를 같이 하기도 했다.


내가 시험에 합격하고 도쿄에서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나의 일본어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그들이었기에 두 친구는 누구보다 이를 기뻐해 주었다. 일본에서 사람들의 주된 교통수단은 자전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기선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한 친구 H는 흔쾌히 내게 자신의 자전거를 여기 지내는 1년 반동안 빌려 주었다. 그 친구는 현재 도쿄가 아닌 오키나와의 이시가키 섬에 살고 있기도 하며, 자기 집에는 자전거가 많아 남아돈다며. 그리고 그 자전거를 타고 도쿄의 멋진 곳들에 대신 많이 가달라고 당부했다. 자전거도 기뻐할 거라며. 외국인 친구가 자신의 고향에 와서 머무는 동안 편하고 즐겁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참 예쁘고 고마웠다.


도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어느 날, H에게 도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어떤 도쿄의 유명한 스팟이 아닌, 공교롭게도 '메이지 신궁(明治神宮)'을 이야기했다. 지난 여행 때 흐린 날 방문하여 조금 급하게 둘러보았었기 때문에,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언젠가 맑은 날 제대로 메이지 신궁을 걸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또 다른 어느 날, 신주쿠 인근에 있는 도쿄도청의 전망대에 올라갔었다. 45층에서 내려다본 도쿄 시내는 어디를 보아도 멋진 풍경이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나무들이 빽빽한 어떤 넓은 녹지였다.


도쿄도청에서 내려다 본 풍경


왼쪽 사진에서 보이는, 빌딩숲 사이의 저 넓고 초록으로 빽빽한 곳이 바로 메이지 신궁이다.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나는 왜 H가 메이지 신궁을 도쿄에서 제일 좋아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나처럼 자연을 사랑하는데,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스가 저런 넓은 녹지를 가지고 있다니. 도심의 편리함을 즐기다가도 인간은 도시에 지치기 마련이다. 도쿄 출신의 H는 분명 그럴 때마다 메이지 신궁에 가서 자연의 에너지를 받고 힘을 얻었을 것이다.


2026. 03. 21.


그리고 드디어 오늘, 기회가 온 것이다. 바로 그 메이지 신궁이 푸르고 맑을 때 직접 가서 걸어보며 자연을 느낄 기회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생각이 떠올랐다면, 그걸 실천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의욕과 의지만큼 실천으로 쉽게 이어지게 하는 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마음이 가는 곳으로 바로 발걸음을 떼었다.


메이지 신궁에 들어가기 위해 하라주쿠 역을 이용했다. 거대한 토리이(鳥居⛩️, 신성한 곳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사 입구에 세우는 기둥문)를 지나 들어가자마자, 하라주쿠 인근의 소음은 사라지고 거대하고 무성한 나무들이 조용히 나를 에워쌌다.


메이지 신궁은 100여 년 전에 메이지 천황과 그의 황후를 기리기 위해 일본 전국에서 1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기증받아 만든 인공 숲이다. 100년이라는 시간의 축적이 만든 숲의 밀도와 경외감은 인간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긴 세월 동안 나무들은 대단한 생명력으로 스스로 자라나고 울창해져 더 이상 이곳은 인공 숲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규모의 자연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신궁


나는 그대로 자연에 압도되어 나무들이 이끄는 대로 걸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메이지 신궁은 약 칠십 만 제곱미터의 넓은 면적으로 내부에는 큰 숲과 함께 신사와 참배 길이 있다. 그래서 내가 들어왔던 하라주쿠 역 쪽 입구와 신사 쪽에는 관광객을 비롯한 방문객이 많지만, 더 깊숙이 숲 쪽 산책길을 걷다 보면 인적이 드문 넓은 잔디밭을 만날 수 있다.


탁 트인 잔디밭은 빽빽한 나무가 이루는 숲이 주는 경외감과는 또 다른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나는 주저 없이 잔디의 한복판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가져온 가방을 베개 삼아, 헤드폰으로 음악을 재생하고 가방에 들어 있던 책을 꺼내 읽다가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기예보대로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맑은 하늘. 이쪽에 활주로가 있는지 하늘 위로는 비행기들도 지나다닌다.


도쿄에 지내다 보면 인구 밀도가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한다. 서울에서 사람에 치이는 것이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사실 도쿄가 아닌 어느 해외 도시에서 조금만 생활해 보아도 비슷한 감각을 경험할 것이다. 낮은 인구 밀도에 절로 편안해지고 여유로워지는 마음. 사람과 사람 간의 물리적 스페이스가 이렇게나 중요하구나.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예민하고 화가 나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도 이 '한 사람이 갖는 물리적 공간'이 너무 적어서, 서로에게 치여서 겪는 스트레스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메이지 신궁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뒤, 요요기 쪽 출구로 나와 요요기 일대를 걸었다. 요요기는 최근 관광객들 사이에 너무 유명해져서, 한국인을 포함한 관광객으로 어딜 가나 붐빈다. 카페를 열 군데는 둘러본 것 같은데 모두 웨이팅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그냥 좋아하는 카페나 새로운 카페에 가는 것은 포깋지난번에 갔던 뒷골목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했다. 그리고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온몸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아무래도 요요기도 이제 평일에 가야만 하는 곳이 되었다.


이제는 친구 H가 왜 메이지 신궁을 도쿄에서 가장 좋아하는지, 몸과 머리와 마음으로 이해한다.

도쿄 여행 중에, 혹은 생활 중에, 도심에 지쳤을 때 메이지 신궁을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도쿄 한복판, 도심 한가운데 있는 이 숲이 당신을 숨 쉬게 해 줄 것이다. 아주 침착하고 안정된 호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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