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히비야 산책

6 - 미나토구 도라노몬, 지요다구 히비야

by 히요쿄

2026. 03. 14.


이날의 외출은 영화 <마티 슈프림>의 예매로부터 비롯한다. 3월 13일 요즘 볼 만한 영화는 없나 토호 시네마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하자마자 재생되는 광고성 예고로 이 영화가 바로 그날 일본에서 개봉했음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가 주연이고, 이미 외국에선 호평을 받으며 좋은 성적을 내고 있고, 게다가 한국에선 아직 개봉 예정이 없다길래 나는 고민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음 날의 영화 티켓을 예매하였다. 3월 중에 한 번 가보고 싶었던 히비야에 있는 토호 시네마에서, 딱 하나 남은 맨 앞자리였다.


서울에서였다면 굳이 맨 앞에서 영화를 보려 하지 않았을 터이나, 상영관이 작아 좌석 수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는 정기권을 가지고 이곳에서의 즉흥적인 생활을 즐기고 있기에 맨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저 영화관 스크린으로 티모시의 얼굴과 연기를 볼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러고 보니 티모시가 최근 강렬한 주황색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를 포함하여 'MARTY SUPREME' 문구가 쓰인 옷을 입은 셀럽들의 모습이 포착되고 같은 문구가 쓰인 오렌지색 비행선이 LA 상공에 떠다니는 등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사운드트랙 또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영화에 푹 빠져 집중해 있을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영화 <마티 슈프림> 포스터(좌)와 마케팅 모습(우)


언제나 외출을 계획할 때면 구글 지도 어플을 켜서 목적지 근방에 저장해 둔 장소들을 살펴본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전에 가고 싶어 저장해 둔 곳들을 최대한 가보려고 한다. 이번에도 역시 히비야를 가려고 구글 지도상에서 주변을 살피다, 궁금했던 도라노몬과 그 주변에 먼저 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산책은 카페 '사푸'에서 시작되어 도라노몬힐스, 히비야 공원, 토호 시네마, 마루노우치 빌딩으로 이어진다.


카페 사푸는 눈앞에 녹지의 정원이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식사나 커피를 할 수 있는 곳으로, SNS에서 보고 그 풍경에 반해 저장해 두었다. 직접 가보니 이곳은 키쿠치 칸지츠 기념 토모 미술관 내부에 있는 카페로, 미술관의 외관, 전경과 어우러져 더욱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SNS에서 봤던 모습보다 실제로 마주한 모습이 더 웅장하고 세련되게 다가왔다. 통창으로 바로 보이는 녹색 풍경과 피아노 연주 음악,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소리와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따뜻한 나무색의 가구들, 그리고 약간 아치 형태의 위로 볼록한, 별이 박혀 있는 듯이 반짝거리는 천장. 이 모든 것들이 어울려 하나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커피와 디저트로 끼니를 때우려 했으나 내가 방문했던 12시 30분경은 차 또는 커피만 마시거나 식사만 할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본격적인 브런치를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풍경이나 공간적인 멋스러움뿐만 아니라 식사의 질 또한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다. 점심은 샐러드와 메인 메뉴(갈레트 또는 파스타), 음료가 나오는 일종의 세트 메뉴였는데, 샐러드와 식전빵을 먼저 제공하고 샐러드를 다 먹고 나면 메인 메뉴를 서브하는 방식이니 미니 코스라고 봐도 무방하다. 샐러드가 먼저 나왔을 때, 식기는 물론이고 샐러드의 재료와 소스의 플레이팅까지 훌륭했다. 식전빵과 함께 샐러드를 먹으며 메인 메뉴로 선택한 갈레트 또한 훌륭한 비주얼과 맛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카페 사푸의 샐러드와 갈레트


과연 갈레트 또한 비주얼과 맛이 모두 좋았다. 샐러드의 경우 검은 접시에 담아 기존 샐러드가 가진 이미지보다 무겁게 연출한 듯했고, 메인 메뉴인 갈레트는 반대로 흰 접시에 담았다. 전채 요리와 메인 메뉴의 밸런스를 맞추어 서브를 받는 고객 입장에서 코스 요리라고 느낄 만한 지점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이 시리즈의 (프롤로그를 제외한) 5번째 글에서도 언급했듯 나는 미식가도 아니고 평소 파인다이닝을 즐기지도 않지만, 그런 나라도 충분히 이렇게 셰프나 가게의 의도를 생각해 볼 법하게 곳곳에서 디테일이 느껴졌다.


바로 앞에는 지긋하신 아주머니들이 마주 보고 앉거나 나란히 앉아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계신다. 이런 풍경을 보며 나누는 대화는 구태여 들어보지 않아도 좋은 대화임을 짐작할 수 있다. 별 거 아닌 일상 이야기에도 서로에게 위로와 영감이 되는 그런 대화. 그다지 살갑지 않은 대화를 하다가도 공간의 힘이 작용해서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풀릴 것만 같다. 혼자 와서 사유하기에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에도 분명 좋은 공간이다.


카페 사푸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도라노몬힐스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깨끗한 하늘과 드문드문 도쿄 타워가 보인다. 이 근방에는 도쿄 타워가 잘 보이는 3대 힐스가 있는데, 그 유명한 롯폰기 힐스와 아자부다이 힐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내가 이날 향하고 있던 도라노몬힐스이다(이 3대 힐스는 도쿄메트로의 히비야선을 타고 모두 방문할 수 있다.). 나머지 두 힐스에 비하면 비교적 덜 알려진 곳인데,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것 같아 붐비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도라노몬힐스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무료로 열리는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 전시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유명한 ‘시청 앞의 키스’ 이외에도 피카소를 촬영한 사진이라든지 파리의 일상이라든지 멋진 흑백사진을 많이 남긴 사진가이다. 전시 공간에 가 보니 전시뿐만 아니라 사진 작품의 판매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작권 문제로 인해 사진은 여러 작품을 하나의 사진에 담는 구도로만 촬영 가능했다.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전(좌)과 히비야 공원(우)


전시를 포함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라노몬힐스 내부를 구경하다 히비야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 시간에 맞추어 영화관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급히 지나왔지만 그 사이에도 공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스민 평화가 온전히 느껴지는 곳이었다. 도쿄의 이런 공원과 녹지 앞에서는 늘 ’역시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책 한 권과 커피를 들고 여유롭게 다시 와야지, 또 다음의 외출과 방문을 기약하며 영화관으로 향한다.


영화는 한 마디로 말하면 ‘미친’ 영화였다. 사실 ‘미친‘ 뒤에 괄호를 붙여 그 안에 p를 넣어야 할지 n을 넣어야 할지 좀 헷갈린다. 일단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주인공 마티 슈프림이라는 인물은 미쳤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강렬한 캐릭터이다. 탁구 실력도 그렇지만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유부녀 애인을 배신하거나 톱스타를 유혹하여 탁구 대회에 나가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등 위태롭고 자극적인 일들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탁구를 향한 열정과 프라이드도 강렬하다. 영화의 후반부, 결말까지 보고 나면 이 인간이 정말 탁구 대회에서 이기고 싶은 단순한 욕망을 가졌던 건 맞나 다시 혼란이 올 만큼 정말이지 ‘미친’ 말과 행동을 계속한다.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는 만큼 전반적인 스토리가 자극적이고 몰아치며, 그에 어울리게 음악 또한 영화 내에서 긴장감을 더욱 연출하는 사운드트랙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왔더니 온몸이 후끈거리는 듯했다. 다만 분명 기분이 나쁘기만 한 자극은 아니었고, 스릴과 쾌감이 어느 정도 동반된 그런 자극이었다. 영화를 보니 도쿄가 꽤나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여 이 지점은 이 지점대로 흥미로웠고, 왜 일본에서 개봉되었고 티모시 샬라메가 최근 홍보차 도쿄에 방문하기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호 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 보이는 풍경이 바로 이 글의 표지 사진이다. 지난 <아침에 도쿄의 중심을 달리며 생각한 것들>에서 묘사했던 바로 그 황궁 풍경이 펼쳐져 눈앞이 시원하고 마음이 뻥 뚫리는 듯하다. 마침 노을이 질 무렵이라 물들어가는 도쿄의 풍경을 잠시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 후 마루노우치 빌딩으로 이동하여 저녁 대신 스타벅스에서 케이크와 함께 커피 한 잔을 했다. 영화를 보며 뜨거워진 머리를 좀 식혀야 했다. 별다른 건 하지 않고 그냥 먹고 마시며 멍하니 머릿속으로 영화의 내용이나 감상을 돌아보았다.


마루노우치 빌딩에서 보이는 도쿄역


그리고 그곳에서 본 도쿄역 배경의 일몰과 야경으로 하루를 마무리. 언제 봐도 멋진 장면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내내 <마티 슈프림>의 사운드트랙을 들었다. 며칠간 나는 음악을 들을 때면 줄곧 이 사운드트랙 앨범을 통으로 재생하곤 했다.


좋은 경험은 좋은 생각들로 이어진다. 그 생각은 단순하게는 마음의 환기이기도 하고, 나에 대해 알아가며 탐구하는 생각이기도, 자기반성적 생각이기도, 나라와 도시의 역사에 대한 생각이기도 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삶을 이루는 것들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과 연결된다. 정기권을 가지고 있느라 더 열심히 도쿄 시내를 다녀보려 하는 3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나는 부단히 경험하며 공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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