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도쿄의 중심을 달리며 생각한 것들

2 - 치요다구 황궁 러닝

by 히요쿄
황거 외원


러너들이 도쿄에 오면 하고 싶어 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 그것은 바로 황궁 러닝.

황궁 주변 역 근처에 위치한 러너 스테이션과 함께 러닝 코스를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매년 마라톤 대회를 나가는 열정적인 러너는 아니지만, 내 페이스에 맞게 3~5km 정도의 거리를 종종 뛰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일산에 살 때는 집 앞의 호수공원이 좋은 러닝 코스가 되어주었고, 도쿄에 와서는 어딜 가든 서울보다 평지인 환경에 기쁜 마음으로 동네를 이틀 연속 뛰기도 했었다.


이틀 연속으로 달리기를 한 건 나의 얼마 안 되는 러닝 인생 중 거의 처음이었다. 하루 뛰면 다리의 근육과 무릎에 어느 정도 자극이 오기 때문에 하루라도 걸러 뛰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틀 연속 뛰었던 게 화근이었는지, 아니면 몇 달 전에 한라산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의 무릎 통증이 만성이 되어있다가 불쑥 증상이 드러난 건지, 다음날부터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원래도 골반이 살짝 틀어져 있어 많이 걷다 보면 왼쪽은 골반에 통증이, 오른쪽은 무릎에 통증이 오곤 했는데,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하는 걸음수의 기준이 훨씬 낮아진 느낌이다. 스트레칭이나 강화운동을 해 보아도 나아지는 건 일시적일 뿐 이미 장기적으로 오른쪽 무릎이 안 좋아진 느낌에 최근 한국에 들어갔을 땐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다행히 엑스레이상 뼈에 큰 문제는 없었는데, 소견상 '슬개대퇴증후군'이라는 진단과 함께 물리치료와 약 처방을 받았다. 조금 나아진 것 같다가도 오랜 걸음에는 여전히 은은한 무릎 통증이 동반되곤 한다.


그렇게 나는 러닝을 몇 달간 쉬었다. 여기선 자전거도 많이 타고 워낙 많이 걷기 때문에 러닝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많은 활동량을 내고 있다는 생각에 더 쉽게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덴샤 정기권을 끊고 3월 동안 도쿄에서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다 가보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야지 다짐한 나는 아주 즉흥적으로 황궁에 러닝을 하러 가게 된다. 날씨가 좋고, 러닝을 안 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중간에 무릎이 아프면 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황궁 주변을 한 바퀴 비잉 돌면 딱 5km가 된다. 절반부터 걷는다 해도 1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을 거리다.


2026. 03. 07.


황궁 러닝 코스의 시작점 중 하나인 한조몬(半蔵門) 역의 러너 스테이션 JOGLIS에 짐을 맡기고, 몸을 충분히 평소보다 더 정성 들여 풀어준 다음 오전 11시경 러닝 시작.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러닝을 자꾸만 방해한다. 러닝을 시작한 지 1분도 안 되어 왜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러너들의 성지, 또는 버킷리스트 코스가 되었는지 깨닫는다. 도쿄에서도 정 가운데에 위치한 이 황궁이라는 곳은 '도심 속 자연'이라는 표현의 대표 격이 될 만한 곳이었다.


황궁은 옛 에도 성이 위치했던 바로 그곳에 있다. 내가 러닝을 시작하기 위해 이용했던 역 이름이기도 한 '한조몬(半蔵門)' 역시 에도 성의 성곽문중 하나였다. 그리고 황궁 주변에는 물이 흐른다. 이건 호수가 아닌 인공 수로 '해자(城の堀, moat)'인데,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의 둘레에 땅을 파놓고 물을 채운 시설이다. 500여 년 전 도쿄가 에도로 불리던 시기, 에도 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흐르는 물의 안쪽에는 무성하지만 정갈한 나무들이 있다. 러너들은 바깥쪽에서 이 해자와 나무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나무들의 안쪽에 천황의 거처인 황궁이 있을 것.


이 자연의 풍경 너머로는 도쿄 역 부근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높은 빌딩들이 보인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도쿄라는 거대한 도심의 가운데에서 황궁이라는 전통적 자연 속에서 뛰고 있구나, 인지하게 되며 역사가 남은 모습과 현대의 산물이 겹쳐 있는 이곳의 환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말 그대로 도심 속 자연에서 나는 달린 것이다. 도쿄의 정가운데 노른자땅에 이런 거대한 자연을 어떻게 개발하지 않고 이렇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그야 당연히 황궁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여기 말고도 도쿄에는 오랜 시간 보존되어 온 녹지들이 곳곳에 있기에, 그와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서울은 녹지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여 날씨가 좋은 주말 서울숲이나 한강에 가 보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는 모습이기에, 두 나라의 차이에 대해 자연스레 또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된 자주권을 찾고 아주 급격한 발전을 이루어 왔기에 그러한 개발 과정에서 녹지를 보존하는 것은 우선순위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의 과정을 거치면 도쿄에 대한 부러움과 동시에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그건 아마 과거 식민 지배의 역사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갖기엔 마음만 소모될 뿐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무력함에서 비롯하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게 역사, 나라의 힘과 경제력, 그것들이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을 생각하다 현재 도쿄에서 경험하며 생각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며 경치에 황홀해하랴 주어진 코스를 달리랴 심장은 기분 좋은 운동을 계속하며 쿵쿵거린다. 그런데 러닝 3km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왼쪽 발바닥의 가운데가 쓰리기 시작한다. 보통 같으면 오른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할 거리인데, 웬일인지 무릎은 괜찮고 움푹 들어간 왼쪽 발 아치 부분이 무언가에 쓸려 상처가 난 것처럼 쓰라리다. 어찌 됐든 무리하면 부상을 입을 수 있단 생각에 그때부터 러닝 페이스를 늦추게 된다. 걷듯이 뛰다가, 잠시 걷다가, 다시 뛰다가, 발바닥이 아프면 다시 속도를 늦추는 그런 페이스로.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러닝을 하다 보면 속도에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을 러너라면 알 것이다. 전보다 잘하고 싶은,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 그렇게 약간의 조바심과 함께 걷다 뛰다를 반복하던 중 이런 안내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タイムよりゆとり」


한국어로 직역하면 '시간보다 여유'. 이곳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러닝 코스임을 감안하면 '기록보다 여유를 즐기는 마음으로.'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안내 문구 위에는 걷고 있는 혹은 뛰고 있는 사람 옆에 음표가 하나 붙어있다. 우리는 신이 나거나 무언가에 즐겁게 임할 때 이렇게 음표를 붙인다. 절로 흥얼거림이 나오는 순간의 마음을 표현한 게 아닐지.


안내 표지를 보고는 조바심이 스르르 녹는다. 그래, 나는 오늘 날씨가 좋아서 해 보고 싶었던 황궁 러닝을 하며 즐기러 온 거였지. 기록을 세우러 온 게 아니야. 안전하게 즐겁게 완주하면 돼. 이미 러닝을 하며 좋은 기운을 받고 깊은 생각들을 했잖아. 그걸로 됐어. 그런 문장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그러고 보면 러닝하며 나를 지나쳐 가거나 내가 지나쳐 온 사람들에는 아주머니부터 시작해서 백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정말 다양한 러너들이 있었다. 이곳에서의 러닝은 서울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러닝과는 달리 도민들의 일상이라고 느껴졌다. 키가 작은 중년의 다부진 남성을 발견하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겹쳐 보였다. 그도 나와 같은 코스를 수없이 뛰었다는 감각에 신기함과 반가움을 느끼고 힘을 얻기도 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수많은 도쿄 도민들이 이렇게 뛰는 데에는 「タイムよりゆとり」와 같은 마음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비단 러닝뿐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도 「タイムよりゆとり」의 자세가 필요할지도.

우리는 너무 일찍부터 보이지 않는 시간표 속에서 살아간다. 몇 살이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느 시기에는 어디쯤 가 있어야 한다는 식의 기준들. 학교를 졸업하는 나이, 취업하는 시기, 결혼해야 할 때. 마치 인생에도 정해진 기록표가 있는 것처럼 그 시간에 맞춰 달려가기를 요구받는다. 조금만 늦어지면 뒤처진 것 같고, 남들보다 속도가 느리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효율과 속도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음미하며 한다는 것은 때로 게으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무엇을 하느냐'보다 '얼마나 빨리 해내느냐'에 더 신경 쓰게 된다.


하지만 달리기를 하며 깨닫듯이, 속도만을 의식하면 달리는 일 자체가 힘겨워진다. 호흡은 가빠지고 주변 풍경을 바라볼 여유도 사라지며, 부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기록에서 잠시 마음을 떼어내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바람의 온도나 나무의 색 같은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며 그제야 ‘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삶도 어쩌면 비슷하지 않을까. 남들보다 조금 느려도 괜찮고, 잠시 걸음을 멈춰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어디에 도착했는지가 아니라 그 길을 어떤 마음으로 지나왔는지일 테니. 지난 반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이곳의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경험하며 인생에서 속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느끼고 있다.


「タイムよりゆとり」

기록보다 여유를 즐기는 마음으로.


어쩌면 삶에서도, 조금 더 흥얼거리며 달릴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고, 아침에 도쿄의 중심을 달리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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