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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Jul 24. 2022

동물이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믿는 사람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믿고 싶은 이유

지난번 모임에 가서 앵무새 이야기를 했다. 앵무새 카페를 가고 싶어 열심히 사람들을 모았으나 생각보다 참여율이 저조하여 못 가서 아쉬웠다고 했다. 옛날에 키우던 앵무새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서 종종 앵무새 생각이 난다고 했는데, 나중에 내 표현을 되새겨 보니 무지개 다리를 건넌다는 표현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보통 키우는 동물에게 정을 주고 그 동물이 죽게 되면, 무지개 다리를 건너서 그 동물의 별에 가서 산다고 한다. 고양이가 죽으면 고양이 별에 가고, 강아지가 죽면 강아지 별에 간다는 것이다. 최대한 죽음을 부드럽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왜 무지개 다리를 건너서 어딘가로 간다고 이야기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 별에 간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반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동물 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이 건너는 것은 무지개 다리가 아니라 장례식이고, 가는 곳은 별이 아니라 사후세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사후세계는 종교적인 믿음 없이도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좌우지간 죽고 나서 사람의 본질은 어디론가 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죽음 이후에도 삶이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믿음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여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왜 사람은 삶이 연속된다고 믿을까? 사람은 정말 자신이 영원히 산다고 믿고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일까?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의 본질이 옷 벗듯이 오래된 육신을 벗어던지고 더 나은 세상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고 믿는 것일까? 사실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은 영생이 아닐지 모른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불멸의 삶이 아니라,  삶은 연속이 아니고 언젠가는 끝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삶이란 생명의 생명징후가 이어질 때만 지속되는 것일 뿐이다. 숨이 끊어지고 체온이 식으며 몸이 분해되어 먼지로 돌아갈 때 삶은 끝난다. 삶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뇌도 함께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에게는, 죽음 너머의 삶이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마음을 쓰지 않는 생명은 유기체 덩어리로 생각하지만, 자신이 마음을 쓰는 것에는 유기체 덩어리 이상의 더 중요한 본질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사후세계로 간다고 생각하고, 동물이 죽으면 그 영혼이 무지개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통해 사람은 공포에서 벗어날  있다. 자신이 마음을  무언가가 영영 사라지질  있다는 공포. 자신이 마음을 줬던 소중한 것이, 다른 한편으로 그토록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한낱 유기체 덩어리와 다르지 않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 또한, 오늘 집에 가며 봤던 나방파리  마리와 다를 바가 없이 영영 사라지리라는,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해도 버티고  있는 사실.  사실로부터 나올 충격이, 생명의 본질은 유기체적 구조가 아닌  이상의 무언가에 있다는 믿음으로 상쇄된다.




삶이란 어느 순간 덧없게 끝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깨어나지 못하는 깊은 잠처럼 조용히  수도 있고, 아니면 갑작스럽게 다가올 수도 있다. 집에 가다가 갑자기 오래된 건물에서 떨어져 내린 외벽에 머리를 맞아,  하는 사이 정신을 잃고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갑자기 핸들을 꺾어 돌진하는 거대한 트럭의 전조등이 마지막 기억이  수도 있다. 의식의 단절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라는 음산한 질문에서 벗어날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의식은 죽더라도 자신의 본질과 함께  나은 곳으로 이어지니, 단절되지 않는다고 믿는  뿐이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현실의 삶은 유한한 것이고, 언젠가는 끝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무한하다고 여기며 그 연속성이 죽음 이후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할 때, 언젠가는 끝나는 삶 그리고 겪게 될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동물이 무지개 다리를 건넌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 연속성을 생각한 표현이다. 비록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던 동물이 죽었지만, 동물의 존재는 과거에 멈춘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을 썼던 동물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또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끔 그 위안은, 무지개 다리라는 조금은 유치해 보이는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언젠간 어떤 방식으로든 겪을 죽음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 사람은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곤 한다. 2018 03, 서울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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