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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덤을 만드는 이유

없어진 것이 있다고 믿으려면

by 문현준

우리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공원이 있다. 공원 앞쪽에 아이들 대상으로 한 병원이 있고, 바로 옆에는 작은 아파트가 있다. 그 작은 공원에는 여유를 즐기거나 동물을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공원에 가려는 생각으로 공원을 가지는 않지만, 가끔 그 앞을 지나다닐 일이 있어 지나가면서 공원을 흘깃 쳐다보곤 한다.




나는 그곳에 내가 오래 키우던 새를 묻었다. 참새보다 조금 큰 크기였던 모란앵무였는데, 몸은 노란색이고 머리는 붉은 색이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머리의 붉은 부분이 점점 진해졌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상태가 좋지 않아졌고, 나는 가끔 새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던 그 공원의 나무 아래에 새를 묻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새의 무덤이 되었다.




사실 꽤 예전 일이고 나는 가급적 빨리 그 일을 잊고 싶었다. 집 안에 새를 떠올리는 물건은 대부분 정리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공원을 지나갈 때마다, 새 무덤을 지나갈 때마다 새 생각이 났다. 가끔은 그냥 지나가다가 일부러 공원 쪽으로 가서 새를 묻었던 곳을 잠깐 보기도 했다. 기억을 잊기 위해서는 더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무덤을 떠올리며 계속 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새를 잊지 못했고, 이제는 공원에 가지 않아도 종종 생각이 나곤 한다. 새가 죽어서 그 육신을 이루고 있던 요소들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겠지만, 새를 묻어둔 땅은 아직 그대로고 나는 계속해서 새를 떠올린다. 아마 나는 내가 땅 속에 묻히고 있을 때까지도 새를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그 경험을 시작으로, 무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나는 내가 옛날 새를 묻은 곳을 무덤으로 생각하고 그 새의 형태가 어떻게 변했던 간에 새가 그곳에 계속해서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무덤을 만들고 그 사람이 그곳에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무덤은 지나가버린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그 대상이 계속해서 머무르는 장소로 인식되는 것 같았다.




복잡한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내가 지켜봐 오던 새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은 결국 유기물의 집합체에 불과하며 결국엔 생명이 다할 수밖에 없다. 어느날 갑자기 그토록 부정해 오던 결과는 닥쳐올 수밖에 없고 사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외면해도, 모든 것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상관없이 똑같다는 것을.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은, 자신과 결속된 존재가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제한다. 그리고 무덤의 존재는 이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천천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계가 존재하는 유기물의 연속성이 단절될 때, 사람은 무덤을 만들어 그 연속성을 이어나간다. 비록 실제로 그 연속성이 끝났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동안은 무덤에서 위로를 받기 위해서.




더이상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의 고통에 시달릴 때, 사람은 그 소중한 존재를 묻어둔 무덤으로 간다. 비록 더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존재가 세상에 없고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해도, 사람은 무덤에서 그 시간이 계속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기대야만 한다.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실에 고정시켜 위안을 얻는 무덤이,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죽음 이후의 의미를 부여한 무덤은, 사람이 위안을 얻는 방법 중의 하나 아닐까. 2020 04,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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