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적인 감정은 돈이 된다
내가 집에서 작업을 하는 공간에는 티비가 있다. 엄마는 자주 그곳에서 티비를 보신다. 티비에서 무엇이던 간에 방송이 흘러나올 때면 나는 그것을 듣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듣자니 귀에다가 밥그릇을 덮어놓은 것 같은 갑갑함이 있다. 결국엔 작업 하면서 계속해서 티비를 신경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방송이 잘 나오는지도 보게 된다.
꽤 예전부터 흔하게 보이는 것은 관찰 예능이다. 관찰 예능 중에서도 시청자들이 누군가를 욕하기에 좋게 편성을 해 놓은 방송들이다. 남편 때문에 힘든 아내를 보여주고, 아내 때문에 힘든 남편을 보여준다. 부모 때문에 힘든 자식을 보여주고, 자식 때문에 힘든 부모를 보여준다. 이걸 보면서 저게 부부와 가족의 삶이라면 차라리 선택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 싶은 정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의도하고 자본이 개입된 방송에 객관성이란 자본주의의 욕조 위에 떠 있는 비누거품 만큼이나 쓰잘데 없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 하지 않는 비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진정한 인간관계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고요~ 하면서 준비했을 기획의도가 끝나고 남는 것은, 눈이 시뻘개진 채 욕하기에 바쁜 사람들이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저런 사람과 사는 것이 가족이고 부부라면 나는 차라리 혼자 살겠어 라고 혀를 내두르고, 그런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방송들.
시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만 늘어놓으면서 아 그거 내가 해 봤는데 쌈박질만 안돼, 너도 결혼하고 자식 낳으면 이 방송에 나오는 저런 식으로 살게 될걸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방송들이 인기리에 방영된다. 많은 사례중에 힘든 사례만 꼽아 너도 그러한 힘든 일을 겪게 될 것이니 조심해라, 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새로운 생각을 하고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시청자들을 붙잡고 화젯거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길거리 도쟁이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걱정일까.
물론 사회가 건강했다면 사람들은 굳이 다른 사람을 미워할 만한 이유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땅 위에 단단히 설 수 있었다면 왜 자신의 발 밑이 무너지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고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발 밑의 땅이 무너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는다. 열심히 살아 왔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결혼도 못하고 집도 못 사고 미래를 고려하지 않은 삶을 산다면 딱 적당한, 말라 비틀어져서 떨어지기 직전의 포도나무 나뭇잎같은 삶이 되어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티비를 틀었을 때 방송들은 말해준다. 너가 결혼하지 않고 가족을 이루지 않은 것은, 너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이런 험한 꼴을 보지 않고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한 합리적 선택을 한 것이라고. 다른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즉각적인 고통의 해갈을 가져다 준다. 문제는 해결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사실 원인이 아니라 고통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면, 좌우지간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경사 아니겠는가?
모두가 꿈꾸는 장밋빛 미래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멀쩡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팽개치고 누군가에 대한 공격성만 부추기면서, 그 공격성이 옳다고 믿게 하면서, 두고두고 회자될 좋지 않은 사례들만 컬렉션으로 수집해서 아 이게 평균이라고요 하면서 보여주는 방송들을 만드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일까.
물론 세련되지 못한 비즈니스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그 사람들이라고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그렇게 방송 만들어서 돈 벌어야 아파트 사고 결혼해야 자식새끼 무시받지 않고 키울 수 있으니까, 자기는 겪었던 굴종을 겪지 않게 할 수 있으니까. 원래 돈 버는 것은 하기 싫은 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요새 티비를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