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힘 빠지던 날
자주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다. 그중에 한 명이 얼마 전 수염 제모를 하고 왔다. 아무리 잘 면도해도 남아 있는 거뭇거뭇한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왁싱했냐고 물으니 레이저 제모를 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 때 학교 후문에서 머리를 깎으며 미용사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예인들 그거 다 제모한거에요. 파릇파릇할 정도로 안보이잖아요 그건 면도로는 못하는거에요.
옛날부터 해 보고 싶었지만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한 나는 레이저 제모를 해 보기로 했다. 친구가 시술 받았다고 한 곳에 가서 피부에 마취 크림을 바르고 기다리다가, 침대에 누워 시술을 받았다. 모공에 벼락을 꽂아넣는 것 같은 따끔따끔한 느낌이 있었지만 금방 끝났다. 며칠간은 손을 못 댈 정도로 따가웠지만 곧 괜찮아졌다. 뭔가 더 깔끔해 진 느낌이었다. 다른 친구는 별 차이 없다고 했지만.
그런데 레이저 제모는 여러 번에 나눠서 해야 한다고 했다. 한 달 간격으로 5번을 하는 것이다. 순간 돈을 두 배 더 내고 한번에 마무리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한 달에 한 번씩 앞으로도 네 번을 또 와야 한다니 너무 귀찮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음 일정을 잡았다.
원래는 목요일에 다시 제모를 할 예정이었는데, 그날 중요한 약속이 생겨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예약을 바꾸기로 했다. 결국 그 다음 주 화요일에 하기로 하고 했는데, 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레이저 기계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다음주로 또 일정을 변경해야 한다고 한다. 성수기라서 레이저 기계를 너무 많이 썼다나.
더 빠른 일정은 없는지 몇 번 물어봤지만 일정이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또 다음주 까지 기다렸다가 제모를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내 약속 때문에 목요일 이었던 것을 다음주 화요일에 하기로 했는데, 또 다음주로 연기가 되었으니 2주 정도 연기가 된 것이다.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 목요일에 제모를 받았다면 문제가 없이 괜찮았을까?
그날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기로 한 것을 두 번씩이나 연기해서 밀려서 못 하다보니 계획대로 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감을 느꼈던 거서 같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냥 제모일 뿐이고, 나중에 하면 되는 것이지만 계획한 것이 반복해서 연기되는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든간에 계획한 것은 빨리빨리 처리해야 속이 시원한 나에게, 오랜 기간을 두고 조금씩 나눠서 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해서 그랬을까. 그런데 살면서 연기되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한두개도 아니고, 겨우 제모가 몇 주 연기된다고 해서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닌데, 그럼 그냥 일정이 밀렸구나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정해진 일정이 자꾸 바뀐 것이 답답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일정이 바뀌던 안 바뀌던 지금 좋지 않은 시기를 지나며 그냥 힘 빠지는 일상에 대한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세상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사람은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뭔가 이유를 찾아서 갖다 붙이려고 한다는 교훈들을 느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