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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Jan 20. 2024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것

기억 속의 그 순간에 돌아왔을 때

고등학교 때 베이킹을 취미로 하곤 했다. 그때는 유튜브도 없고 인터넷 검색하는 방법도 잘 몰라서, 모든 계획을 주먹구구로 세우곤 했다. 레시피를 찾기 위해 일단 광화문 근처의 거대한 서점에 가서 거기 있는 거대한 독서 검색 단말에 키워드를 검색한다. 베이킹이나, 쿠키나, 케이크 같은 것. 그러면 20가지 레시피 이런 식의 제목이 지어진 책을 하나 사서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어 보는 것이다. 




어떤 레시피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에는 재료를 구할 차례라, 그때 당시 인터넷으로 물건 사는 법도 잘 모르던 나는 인터넷에 베이킹 재료 사는 곳 같은 것도 검색해 서울 시내의 방산시장이라는 곳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내가 방산시장에 처음 가게 된 계기였다. 방산시장은 그 근처의 거대한 시장을 통짜로 묶어 부르는 이름이고 그중에 베이킹 재료를 파는 곳들은 작은 구역에 몰려 있지만, 거기 가면 베이킹 재료들을 편하게 구할 수 있다더라 하는 말에 방산시장에 가 보게 되었던 것이다. 




방산시장에 가서 베이킹 재료를 파는 가게들 중 하나에 들어가니, 좁은 공간에 베이킹 재료가 한가득 몰려 있었다. 처음 보는 것들 투성이인 그 공간이 나에겐 그저 신기했다. 버터나 견과류, 특별한 향이 나는 술, 초콜릿이나 가루 같은 다양한 재료가 선반에 꽉 들어차 있는 그 가게 안에 사장님인듯 보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손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외국인이 와서 물건을 찾는지 손짓발짓으로 아몬드를 설명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생 아몬드고, 어떤 것은 볶은 아몬드라고 설명하는지 후라이팬으로 볶는 흉내를 내면서 설명했다. 그때 그 아몬드 볶는 흉내를 내던 사장님의 얼굴과 그 분위기가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비록 고등학교때 하던 베이킹은 내가 케이크 시트를 너무 많이 실패하는 바람에 포기했지만, 시간이 또 오래 지나 다시 베이킹을 취미로 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는 무언가를 검색할 때 책을 찾기보다는 인터넷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물건을 살 때는 시장에서 직접 보고 사기보다는 보통 인터넷으로 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방산시장을 갈 일이 없어졌다. 베이킹을 하면서 방산시장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지만 베이킹 재료를 시장에서 사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거기 가면 베이킹 재료를 살 수 있다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집에서 편하게 재료를 받아볼 수 있는데다가, 근처에 내가 들릴 곳도 없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방산시장은 내 추억 속의 장소로 다시는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을지로 쪽에서 베이킹을 할 일이 많이 생겼다. 갑자기 베이킹 재료가 필요한 순간이 종종 생기는데 꽤 곤란했다. 베이킹 재료는 다른 재료들과 호환도 잘 되지 않고 구하기도 쉬운 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령 제육볶음을 먹고 싶었는데 돼지고기가 없으면 닭고기를 넣어 먹어도 되겠지만 쿠키를 하려는데 버터가 없으면 다른 것을 쓸 수가 없다. 게다가 닭고기나 돼지고기는 구하기 쉽지만, 버터는 베이킹을 하기 위해 사려 하면 생각보다 구하기 쉽지가 않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베이킹 재료를 확인했는데 토요일에 할 베이킹의 재료가 부족하면 당장 재료를 구할 곳이 없는 곤란한 일이 생긴다. 원래는 지하철을 타고 좀 가야 하는, 버스터미널 쪽에 있는 규모가 큰 베이킹 전문 재료 마트를 이용했는데 생각해 보니 가까운 곳에 방산시장이 있었다. 걸어서 15분 정도만 가면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방산시장을 갔다. 포장재료와 박스들을 팔고 있는 거대한 시장 안쪽, 베이킹 재료들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 있는 작은 공간. 그리고 그곳에, 내가 고등학교때 갔던 베이킹 재료 가게도 그대로 있었다. 그 가게에 있던 사장님도. 10년도 더 전에 그곳에서 외국인에게 아몬드를 설명하고 있던 사장님도.




내가 사장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다시 본다고 해서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 들어가자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내가 맨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가 떠올랐다. 마치 그게 10년도 더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얼마 전의 이야기인 것처럼. 변하지 않는 공간과 변하지 않는 물건들, 변하지 않는 사람. 비록 10년도 더 시간이 지나긴 했어도. 




시장에서 사지 않는 물건을 시장에서 사기 위해 방산시장에 갔을 때,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간 방산시장은, 10년도 전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2023 08, 서울 창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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