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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Feb 05. 2024

복권 되면 뭐할거에요

쓸데없는 상상이라는 걸 알지만

친구가 한 명 있다. 이 친구와는 시간을 쓰는 것이 지루하지 않다. 둘이서 시덥지않은 개그를 해도 헛소리를 해도 죽이 잘 맞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사실 인간관계의 생산성과 유쾌한 시간씀은 항상 비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항상 유쾌하지는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친구와 만나면 적어도 심심하거나 지루하거나, 할 말이 없거나 하지는 않아서 흔치 않은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얼마 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일을 안 하면서 주말에 다른 일을 하는 둘이서 사실상 백수와 똑같은 입장이기에 평일에 시간을 내서 앵무새 카페를 가 보기로 했다. 옛날에 앵무새를 키웠던 나는 강변역 근처에 새로 문 연 앵무새 카페를 가 보기로 몇 달 전부터 이를 갈며 친구를 꼬드기고 있었는데 드디어 시간을 내서 가 보게 된 것이다. 앵무새 카페를 갔다가 명동역 근처의 팝업스토어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을지로 쪽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일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오뎅 가게였다. 을지로 쪽에 많이 생기고 있는, 일본 분위기 강하게 풍겨오는 오뎅 가게. 오뎅을 주문하면 종류별로 다양하게 큰 그릇 안에 담아주는 곳을 인터넷으로 본 덕에, 일전에 근처의 다른 가게에 가 보았으나 내 생각과 달라 아쉬웠었다. 그러다가 분명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 곳을 찾고 나서 언젠간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이날 평일 조금 이른 시간이기도 해서 기다리지 않고 가게에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바로 가기로 했다.




비록 입구 쪽에 앉았던 탓에 내가 몸으로 찬바람을 막아주겠다며 쓸데없는 허세를 부렸지만, 생각보다 많이 춥지는 않았다. 뭔가 거하게 많이 먹고 싶었지만 이젠 그렇게 많이 먹어봤자 속만 안 좋다는 것을 안 나와, 평소와는 다르게 그런 나에 맞춰서 적당히 먹는 친구 둘이서 모듬 오뎅에 이것저것을 추가해 먹어 보았다. 둘이서 맥주 한 잔과 하이볼 한 잔씩 딱 먹으니 적당히 마무리 되어서, 가게를 나서니 길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을지로 쪽은 옛날과 다르게 갈수록 사람이 많아지는 느낌이라, 관심 있던 도루묵과 오뎅집을 담번에 가 보면 어떠냐 이야기 하다 보니 왜인진 모르겠지만 복권 이야기가 나왔다. 인터넷에 자기가 복권 당첨되고 나서 돈을 어떻게 쓰는지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한 것 아니냐고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친구가 오빠는 복권 당첨되면 뭐 할거에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 이야기를 딱 듣자마자 야 그거 쓸데없는 상상이야 하는게 역시 감성적인 F는 못 되는구나 싶었다. 나름 F 라고 생각하는데도, 기계적일 정도로 이성적인 T 아닌가 싶었다.




좌우지간 아 그거 복권 당첨되면 뭐 할거냐 하는 생각이 진짜 의미가 없다. 그러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고, 그걸 얻어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게 되며, 결국엔 그 행복한 상상을 이루려면 복권이라는 말도 안되는 수단을 동원해야 하는구나 라는 우울하기 짝이 없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 그런 생각 안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복권이 되면 뭐 할거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좀 생각을 해 보고 나서, 뭐 복권이 된다고 해서 지금 하던 것을 다 내려놓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일은 하고 돈은 벌어야겠지만, 그래도 카메라나 컴퓨터 같이 사고 싶은 것 좀 사고 그래봤자 돈을 많이 쓰지는 않을 것 같고. 지금 살고 있는 전세 집 말고 좀 그럴싸한 아파트로 이사 가고, 지금 일하는 가게 부동산 매수할 수 있다면 그정도로 충분한 것 아니겠느냐 말했다. 물론 두번째와 세번째를 하기엔 복권이 당첨되도 부족한 것 아닐까 싶었지만 말이다.




친구는 자기가 복권 당첨되면 뭘 할진 모르겠는데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겠지만 나와 종종 만나는 대학교 친구 한 명까지 두 명에게는 복권 당첨되었다고 말 하고 선물 하나 사 주고 싶다고 말했다. 저를 그렇게 좋게 봐 주셨어요? 아주 감사하네요 하고 말하니, 그러게요 우리가 안 지가 벌써 그렇게 오래 되었네요. 왜 그렇게 오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하고 말하는데, 그 유쾌한 분위기가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인간관계는 흔치 않음도 확실했다.




항상 사람이 많아서 붐비는 국밥집 앞의 지하철 출입구로 내려가서, 집으로 가는길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많은 생각을 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루함 없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인간관계는 정말 만나기 힘들고 귀하다는 것을.




쉽게 만나기 힘든 유쾌한 친구와 그 분위기에서, 복권 당첨되면 뭘 할까 하는 상상을 했다. 2023 08, 서울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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