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
어릴때 병원에 가면 다양한 책과 잡지가 있었다. 그중에는 다양한 새의 사진이 들어간 모음집도 있었는데, 나는 그 책을 꽤 좋아했다. 아마 이름이 자연과 어린이 였던 것 같은데, 나중엔 엄마가 이걸 집으로 구독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집에서도 잡지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새를 좋아했던 것 같다.
집에서 몇 번 병아리를 키우고, 새장 속의 새도 키워보고 하다가 내가 군대 갔을 때쯤부터 우리 집은 앵무새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키운 모란앵무는 5년 정도를 키웠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사람 손을 태워서 키웠기 때문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손과 어깨에 잘 올라왔다. 몸은 노란 색에 머리가 주황 색이었는데, 머리의 색이 나이를 들수록 진해졌다.
뭐든지 그렇겠지만 집에서 생명을 키운다는 것은 사진이나 몇 장 찍으면 끝나는 편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사람 흔적이 느껴지면 새장에서 꺼내 달라고 새장 문을 흔들어 대는데 쉬고 싶을 때에는 이게 너무 시끄러웠다. 몸에서 나온 털과 배설물이 사방 천지였고, 화분 흙을 파먹으며 사방에 부스러기를 흩어 놨고, 부리는 작은데 입질은 어찌나 하는지 종이란 종이는 다 찢어발겼다. 그렇게 찢어발길 거면 밖에 나가서 찢어발기라고 정말 가끔 공원을 데리고 나갔는데 공원에 나가면 어깨 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가 너무 허무하게 죽고, 새와 관련된 물건은 다 치워 버렸다. 새장도 정리해서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뒀고, 이젠 집에 조금씩 남아 있던 깃털도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던 새의 흔적이 이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 새를 키우던 옛날이 생각난다. 그 작은 몸집의 온기와 울음소리, 알록달록한 깃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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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앵무새 카페를 갔었다. 서울 안에 제대로 되어 있는 곳이 별로 없는 듯해 잘 찾아서 갔는데, 다양한 앵무새를 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가만히 있으면 어깨와 손 위로 날아오는 새를 관찰하는 것도 좋았고 나중에 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묘하게 다시 가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앵무새 카페를 가서 앵무새를 보고 감탄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물을 오래 키운 사람들은 동물을 잃어버리고 나서 새롭게 동물 키우는 것을 주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개를 키운 사람이 개의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나서,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심하는 그런 것이다. 내가 앵무새 카페에서 느낀 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건 단순히 상실의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아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릴 고통을 또다시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사람이 살면서 애착을 가지고 깊은 관계를 가질 때, 그것에 마음의 한 켠을 내어준다. 언젠가 그 관계를 잃어버리고 나서도 그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만약 새로운 무언가와 비슷한 관계를 새로 형성하게 된다면, 그 관계가 차지하는 공간은 새로운 곳이 아니라 기존에 비워진 그 공간이다. 아무리 새로운 관계라 해도 그것에 내어줄 마음의 공간은, 기존에 무언가가 차지하던 빈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 두려움 이상의 무언가는,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며 자신의 마음 속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 공간을 다시 채워 나갈때, 덮어쓰이거나 잊혀져 사라지고 있는 자신의 옛 추억에 대한 것일 것이다. 자신이 잊어버리거나 놓아버린다면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기억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자신이 잊어버리고 있다는 불편함.
하지만 그 불편함은 사람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보다, 새로운 관계에서 만족감을 바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그 옛날의 추억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한다는 것에서 가치를 찾으며, 새로운 기억과 내일이 그 추억을 대체한다는 것을 꺼린다. 그 잊고 싶지 않은 추억도 결국엔 무언가를 대체한 것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것은,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다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을 한사코 외면하는 마음일 것이다.
너무나도 모순적이지만 그러기에 인간적인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