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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Oct 24. 2021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왜 희망이었을까

희망인가 재액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는 현대사회서도 자주 언급되는 소재이다. 제우스는 인간세계에 벌을 주고 싶었지만 대놓고  수가 없어서, 올림푸스 신들의 모든 능력을 이용해 완벽한 여자 판도라를 만들었다. 판도라는 인간과 결혼했는데 제우스가  결혼 선물인 상자를 열어 보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때문에 열어 보고 말았다. 상자에서는 온갖 재액이 나와 세계로 퍼져 나갔고 판도라는 급하게 상자를 닫았다. 상자 안에 남은 것은 희망 뿐이었고, 희망은 자신이 있으니 어떤 시련도 이겨낼  있다면서 판도라를 위로했다고 한다.




사실 판도라 자체 보다는 판도라의 상자라는 말이 더 빈번하게 쓰이는 듯 하다. 열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언급하곤 할 때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곤 한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판도라의 상자 자체보다는 판도라의 상자 안에 희망이 남았다는 내용인 듯 하다. 인간사회의 고통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런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짧은 신화 속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분명히 희망은 역경에 처한 사람에게 힘을 준다. 지금 당장 직면하고 앞으로도 직면할 고통을,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이 희망이다. 만약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끝나지 않는 고통에 절망하고 순응하여 미쳐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희망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 있던 희망은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축복이었을까? 존 월리엄 워터하우스, 판도라, 1896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 있던 희망은, 각종 재액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제우스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판도라의 상자에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온갖 재액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희망이 그 상자에 재액들과 함께 들어 있었다. 재액들과 함께 전혀 다른 성질의 희망이 들어 있다고만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사실은 다른 재액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앞서 말했듯 희망은 고통을 이겨내는 인간의 힘으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사실 정 반대의 해석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희망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모든 것을 허비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고, 그 사람과 잘 될 수 있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사람들은 몰두하곤 한다. 가능 불가능의 여부를 떠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며 비이성적으로 몰두하고 희망을 가진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희망이 악 중의 최고의 악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에 남았던 희망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그곳에 남았던 이유는, 짧은 인생을 될지 되지 않을 지 모르는 무언가에 집착하게 만들고 그것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하는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축복이라는 얼굴을 하고 재액으로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희망은 그 자체로 희망이기도 하지만, 거짓 희망이 되어 희망고문이 되기도 한다. 판도라의 상자,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




희망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이겨낼 힘을 준다. 지금 힘든 일들이 앞으로 더 괜찮아 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살아갈 수 없다. 한달에 급여 절반의 돈을 저축하면 언젠간 안정적이고 발전된 생활기반을 가지리라는 희망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언젠간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부모님이 이루었던 그런 가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희망이다.

하지만 희망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죽게 만들기도 한다.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생활기반을 가지기 위해 수많은 행복을 포기하며 한달에 절반의 급여를 봉인하게 만들고 그 행동을 종용한다. 집도 못 사고 결혼도 못 할 것이고 부모님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의 발끝도 자신은 해낼 수 없는 그런 세대임에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꼬드긴다. 끝낼 수 없는 고통을 언젠간 더 낫게할 수 있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가능하다고 속삭인다.




어쩌면 재액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한 희망의 이러한 모습이, 결국 희망만이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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