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까기가 이렇게 힘들었나요
나는 한국에 약간 특별한 형태의 은행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비밀리에 운영되는 이 은행은 밤이 한가득 들어 있는 창고를 가지고 있어서, 가을철이나 특별한 때가 되면 방문하는 부모님들에게 밤을 한 포대씩 나눠준다. 이런 은행이 있지 않고서야, 가을만 되면 이전 가을에 받은 밤 위로 쌓이는 새로운 밤들을 설명할 수 없다. 그 은행은 아마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밤 쏟아지는 항아리나, 캐도캐도 끝없이 나오는 밤 광맥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엄마는 친척들과 모임을 하고 나서 밤을 한 포대 가져오셨다. 옛날에는 밤 하면 구워 먹는다는 생각이 있어서 칼집을 내고 군밤을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서 이렇게 군밤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많은지 인터넷에 보면 바닥이 뚫린 형태의 군밤 전용 냄비를 파는 경우도 있다. 군밤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면 삶아 먹는 것이 가장 일반적일 것이다. 밤 알을 밥에 넣어서 밤 밥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엔 밤으로 특별한 요리를 한번 해 볼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밤식빵 이었다. 한동안 쿠키를 열심히 굽고 나서 이제 흥이 식었는지 요새는 빵을 구워 보고 있는데, 밤식빵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관련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빵도 구울 수 있고 밤 요리도 할 수 있는 밤식빵이 딱이다. 갓 구운 빵 만큼 나눠주기 좋은 선물도 없다.
그런데 예상 외의 난관에 봉착했다. 맛있는 밤은 얇고 털이 난 껍질로 빈틈없이 둘러 싸여 있고, 그 껍질은 또 아주 단단하면서 유연한 외피에 둘러싸여 있다. 호두처럼 내려친다고 깨지는 것도 아니기에 칼집을 내서 잘 뜯어내야만 하고, 뜯고 나서도 안쪽의 내피까지 까야만 한다. 게다가 내피는 과육에 딱 붙어 있기 때문에 내피를 많이 깎아내면 그만큼 과육에 손실이 생긴다. 짧게 말하면, 밤 까는 일은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간다는 것이다.
밤 껍질을 까겠다는 생각에 밤을 한 바가지 가져다 놓고 밤 가위로 작업을 시작한다. 밤 가위는 무언가를 자르기보다는 겉면을 얇게 깎아내기에 알맞게 변형되어 있다. 겉껍질을 까내는 것은 칼에 비교할 수 없게 편하지만, 겉껍질을 까다 보면 내피의 과육이 함께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큰 알밤으로 까고 싶은데 까다 보니 점점 중간 크기의 알밤이 되어간다.
게다가 물 한 바가지를 같이 떠 두고 밤을 까다 보니, 짧게 잘라낸 밤의 조각이 손가락에 달라붙는다. 당분이 들어 있는 것인지 아주 작은 밤 과육의 미세한 조각들이 손끝에 달라붙는다. 작업 도중에 물에 젖은 밤 조각이 말랐다 젖었다를 반복하면서 피부에 더 들러 붙어서, 껍질을 다 까고 나니 단단하게 손에 붙어 있다. 벅벅 문대도 잘 떨어지지 않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껍질을 다 까고 나니 쓰레기가 한 무더기 나온다. 이렇게 힘들게 껍질을 깔 바에 그냥 외피만 벗겨서 정리한 뒤 졸여 버릴까 싶지만 내가 생각한 밤식빵의 밤은 노랗고 하얀 색의 색감이 좋을 것 같아 속껍질 까지 깔끔하게 까기로 한다. 한 바가지를 가져다 놓고 아무 생각 없이 밤을 깠더니 한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최근에 한 작업 중에 가장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작업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 하는 것이지만 이정도는 꽤 고달픈 작업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옛날에 엄마는 그냥 작은 칼로 밤을 까곤 했다. 엄마는 밤을 찐 다음 까서 작은 통에 넣어두고 먹으라고 하곤 했다. 비록 한번 쪄 냈다곤 하지만 밤 가위도 없이 칼로 밤을 까는 것은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좋은 밤이 생겼으니 다 같이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엄마는 밤을 깠겠지.
공들여 깐 밤을 한번 씻어서 설탕과 물에 졸인 뒤 밤식빵을 만들어 본다. 처음 만든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몇번 더 해본다면 더 괜찮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만족스러울 정도까지 밤식빵을 만들고 나면 엄마에게 드리고 싶다. 달콤한 밤절임을 넣어 갓 구운 밤식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