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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Nov 21. 2021

책 아니면 폐지

의미가 없어질 때 그저 짐짝이 되는 것

나는 책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 동물 사진이 많이 들어간 책을 좋아했고 부모님은 우리 애가 나중에 공부를 잘 할거라는 흔한 기대에 생각에 책을 많이 사다 주셨다. 비록 부모님 기대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읽는 것은 좋아했다. 책을 사는 것 말고는 구하는 법을 잘 모르던 때였고, 그 결과 조금씩 산 책이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던 집을 떠나 이사를 갈 때 쓸데없이 쌓아둔 책을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들고갈 수 있는 책은 얼마 되지 않았고 버린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몰랐던 그 때, 앞으로 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책을 다 분리수거 날 내다 버렸다.



그렇게 이사에서 살아남은 책들이 사과박스에 차곡차곡 담겨서 이사한 집 구석에 쌓여 있었다. 문득 그 책들을 보고 있자니 쓸데없이 공간을 차지하는 저 책들을 앞으로 더이상은 읽을 일이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다 버려야겠다 생각했지만 사실 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물건이 아무런 손이 닿지 않은 상태로 그곳에 쌓여 있는 것은, 굳이 그것을 치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까.



그러다가 그 공간을 다 갈아엎고 무언가 실용적인 공간으로 꾸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나는 사과박스 안에서 빛을 보지 못하던 책들을 밖으로 꺼냈다. 유명 서점 업체의 중고거래 서비스를 이용하니, 책을 바코드로 찍어서 한번에 묶어 배송 신청을 할 수 있어서 매우 편했다. 박스에 담아서 집 앞에 두면 가져가는 것이 어찌나 편리한지. 그렇게 네 다섯 박스의 책을 다 꺼내 일일이 바코드를 찍고 며칠에 거쳐서 천천히 내놓았다. 하지만 절반 정도의 책은 팔 수가 없었기에 노끈으로 둘둘 묶어 밖에 버렸다.



책을 다 팔고 나서 받은 돈을 보니 10만원 정도가 되었다. 사과 박스 몇 개 분량의 책을 버리고 팔았는데 손에 쥔 돈으로는 정말 의미가 없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분명 맨 처음 그 책의 가치는 그것보다 더 비쌌을 텐데, 지금은 그저 폐지와도 같은 취급을 받으며 쓰레기로 버려지거나 그에 준하는 헐값에 팔려나간 책의 현실을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폐지 취급되는 책을 보는 것은 기분이 묘하다. 10/02, 한강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도입부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저자가 어릴 적 우주에 대해 알고 싶었을 때 도서관에 가서 별들에 대한 책을 달라고 했더니 별이 아닌 연예인에 대한 책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때도 그랬고 내가 어릴때도 그랬고,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내용의 책을 찾았다. 누군가에게 물어본다면 그 질문을 들은 사람도 책을 찾았다. 결국 고전적인 책의 위치란, 믿을 만한 정보를 찾는 원천이었던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다른 영상매체가 있음에도 책이 한동안 오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직까지 영상매체에 대한 접근성이 책보다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텔레비전이 생생한 정보를 전달해 준다 해도, 텔레비전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이 가지고 있던 우위는, 이미 오래 전에 모두가 아는 방식으로 끝났다. 이제 책은 더이상 정보의 원천이 아니라, 종이에 활자가 찍힌 갬성적인 무언가로 어필한다.



그리고 지금, 책은 트렌드를 따라가기엔 너무 느리다. 책은  나은 정보 전달의 수단들에게 압도당하고 있다. 현재 책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어쩌면 그저 아주 작은 감성적 기억일 뿐일지 모른다.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아주 주관적인 기분.



한때는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었을 책이 한낱 폐지로 변해버린다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책이 버려질 때 남는 것은,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감정적 기억뿐일 것이다. 9/18, 서울 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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