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최근에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여권 만료가 2025년 5월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2월에 일본을 갔다 오고 나서 여권 갱신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전날 일본 입국을 위해 입국심사 전산등록을 하는 과정에서 여권 정보가 만료되었다고 뜨는 것이었다. 어? 하던 나는 여권 만료일을 다시 보았다. 2025년 5월이 아니라, 2월 초반이었다. 그걸 보고 있는 것은 출국일 전날, 이미 만료일을 넘겨 버린 시점이었다.
요새 바쁜 일들이 많아 크고 작은 것들을 챙기지 못했더니 결국 이런 사단이 나는구나, 이렇게 여행을 못 가는 것일까 싶었는데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일전에도 한번 가족끼리 일본여행을 가려 했는데, 운동 선수였던 동생이 여권 만료인 것을 확인하여 급하게 공항에서 여권을 만들어 갔던 기억.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것이 있었지, 해서 확인하니 공항에서 여권을 급하게 만들어서 출국할 수 있었다. 비록 오전 비행기를 오후로 바꿔야 했지만, 그것 외에는 문제 없이 갈 수 있을 듯 했다.
결국 같이 여행을 가기로 한 일행은 나중에 조금 여유있게 공항에 도착하기로 하고, 나는 일찍 가서 여권을 만들기로 했다. 원래 비행기를 탔을 시간에 공항에 도착해서 여권 민원실로 가니 넓은 공간 안에 여권 관련 업무를 보는 부서들의 창구가 여러 개 있었다. 신청서 여건이 부족하다면서 추가 작성해 달라는 말을 들은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었던 나는, 다행히 문제 없이 여권을 기다리며 공간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나름 편한 자리에 콘센트까지 있는 소파 자리까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여권 민원실 자리라는 것이 약간 분위기로 따지자면 내가 군대 갔을 때 훈련소 앞에 있던 음식점 같아서, 다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긴급 여권을 만들러 오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 중에는 장거리 여행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여권 발급 후 여행 일정 진행을 확정할 수 없어 포기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기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노트북을 펴고 정리를 좀 하려던 나는 정리 되는 대로 나가는게 좋겠다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여권을 만들러 왔는데, 나처럼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서 여권 사진을 아주 공들여 찍은 다음 긴급 여권을 만들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가려고 했던 중국은 긴급 여권으로는 입국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여권을 사실 잃어버려서, 공항에서 긴급여권을 만들어서 가려고 했는데, 중국은 긴급 여권으로 못 간다고 한다. 지금 어디까지 왔느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듣자니 내 마음까지 안 좋아지는 느낌이라 여권이 나오면 바로 자리를 떠야겠다 싶었다. 몇 층만 올라가면 여행을 간다는 설렘을 품은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곳이 있는데, 또 그 아래는 이렇게도 무겁고 묵직하다니.
여행을 가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친구와 시간까지 맞췄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이 사람은 결국 여행을 못 가게 되는 걸까? 나같으면 어떻게 할까. 만약 내가 오늘 이런 일에 처했더라면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며 일단 서울로 돌아가는 공항 버스를 알아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잠깐 고민하다가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말했다. 우리 그럼 다른 데 갈래? 갈 수 있는 곳 다른 곳. 그 사람은 여권발급 창구 직원과 긴급여권으로 갈 수 있는 나라에 관해 이야기 하고 나서, 항공사 창구에 일단 가 보겠다고 친구에게 전화하며 그곳을 떠났다. 때마침 내 여권도 나와서, 나도 주저하지 않고 캐리어를 끌며 그곳을 나섰다.
생각해 보니 그때 다른 곳을 간다는 생각은 나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계획된 여행을 가거나 안 가거나인데, 그 상황에서 빠르게 판단해서 친구와 갈 수 있는 곳으로 여행지 선택을 한 것을 보니, 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모르던 해답을 알게 되서일까, 아니면 그 사람이 친구와 여행을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였을까.
아래쪽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공항 안, 여행의 설레임이 잘 느껴지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적당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가 시간이 되어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다. 문득 보안 검색대에서 본 어떤 사람의 뒷모습과 가방은, 내가 여권 창구 앞에서 본 그 사람의 것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비록 진짜 그때 내 앞에서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친구와 맞춘 소중한 시간에 즐거운 경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을 계획하기 전에는 꼭 여권 만료일을 확인 하자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