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을 하는 이유
어릴 적 유명 정치인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얀 꽃을 올려놓기 위해 기다리고, 어찌나 많이 밟혔는지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게 된 풀들이 기억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큰 규모의 장례식들도 몇 번 보았었다. 그런 장례식들은 꽤 호화스럽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치스러운 화환들로 가득하다. 방문한 사람들은 비통한 얼굴로 고인의 죽음을 기념한다.
여태까지 나는 장례식이 고인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장례식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어차피 고인은 이미 세상에 더는 없는데 그 고인을 위해 장례식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대 장례 풍습에서 죽은 자를 위해 재물을 같이 매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장례식이란 다양한 절차와 경제적인 비용을 거친다. 이것이 과연 온전히 죽은 자를 위한 것일까?
각기 다양한 배경을 가진 문화가 지구 위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각기 다른 방식의 장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죽고 나서 그 죽음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고, 죽음 이후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다양한 간격으로 그 죽음을 기념하는 문화가 있다. 묘지를 만들기도 하고, 특정한 날 그 죽음을 다시 떠올리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자원을 소비하는 이유가 과연 죽은 고인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기념하는 행사에는,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다양한 규모의 사회 안에서, 인간은 각각 다른 존재와 복잡한 관계를 만들며 살아간다. 복잡한 관계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밀접하게 묶인다.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관계의 마지막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보통 관계의 종료이다. 다양한 이유로 관계를 더이상 지속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관계의 단절은 그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관계의 단절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고 언젠가 반드시 겪게 될, 죽음에서 온다.
몇몇 사람들이 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보았지만 결국 피할 수 없었던 죽음. 어느날 갑자기 교통사고처럼 찾아오는 그것은 사람이 유지해 나가던 인간관계의 큰 주축 하나를 통째로 도려내어 버린다. 인간관계에 의존하고 감정적인 만족감을 얻고 있던 사람에게, 그러한 관계를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큰 고통이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그 사람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관계의 상실과 그 고통 이전에, 어안이 벙벙해진 당황스러움이 먼저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에게 그런 상실을 준, 무엇이던간에 그 원인이라 생각하는 것에 대한 분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막막함. 자신이 원했던 인간관계를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슬픔. 더 좋은 인간관계로 그 사람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 다양한 감정들이, 죽음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상실에 따라온다. 결국 누군가가 죽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칫하면 사람을 집어삼켜 버리고 그 부정적인 감정 자체만 남겨 버린다.
그리고 장례식이 열린다. 그 사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똑같은 사람을 잃었고, 비슷하게 인간관계의 상실을 겪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고인과 자신이 상실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오롯이 자신만이 인간관계를 잃은 것이 아님을 안다. 그리고 아직 다른 인간관계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은 사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그것이다.
장례식의 이러한 과정은, 사람들이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위로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사람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애써 부정하던 것을 넘어서, 결국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남은 사람들은 살아야 함을 알려준다. 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죽은 사람을 알고 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주는 위로를 통해서 알려 주는 것이다.
결국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죽은 사람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은 삶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비록 소중한 사람을 잃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가끔 옛날의 기억이 떠오르면 묘지에 찾아기도 한다. 혹은 특별한 날 똑같은 상실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오직 자신에게만 고독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렇게, 마음은 죽음을 대한다.
물론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이, 알력다툼은 있을 수밖에 없고 장례식의 방향도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변화된다. 누가 더 비싼 꽃을 가져왔느냐, 누가 부조금을 많이 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왔느냐 같은 것으로 장례식이 가지는 의미가 평가되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평가되기도 한다. 죽은 사람을 기념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행해야만 하는 문화적 규율로 적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장례식이 다양한 문화에서 비슷한 방향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은, 상실을 겪은 사람에 대한 위로라는 그 본질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우리는 언젠가는 장례식에 갈 것이며, 우리의 장례식에도 누군가가 올 것이다.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고,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