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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Mar 27. 2022

교훈 2, 부모님을 모시는 숙소는 철저히 알아보자

스위스의 부모님과 컵라면

유럽에 도착하고 스위스에 도착한 뒤 다음날. 잠을 몇 시간 자지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덜 피곤한 느낌이라, 일어나서 나가기로 한 시간 한참 전에 일어나서 부모님이 부산을 떨고 있었다. 나는 소파베드에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밖에 있는 공용 샤워실에서 샤워를 했는데 물이 안 빠진다는 것이었다. 




"샤워를 목욕탕 밖에서 하셨어요? 바닥에 배수 구멍이 없어서 물이 안 빠질텐데. 욕조 안에서 커튼 치고 하셔야해요."




어쩐지 물이 안 빠져서 이상했다는 엄마의 말에, 내가 다들 같이 쓰는 샤워실이라 국제망신 안 당하려면 바닥 정리하고 나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엄마는 귀찮은 기색으로 난처해하더니 나가서 정리를 하고 오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나는 세수를 하기 위해 샤워실로 가다 같은 층을 쓰는 듯한 외국인과 마주치고 나서 돌아왔다. 그런데 잠시 후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나가 보니 아까 그 외국인이다.




"혹시 아까 샤워실 썼니?"

"어...아마 우리 부모님이 썼을거야."

"샤워 할 때는 욕조 안에서 해야해. 바닥에 배수로가 없어서 물이 빠지지 않아."

"사실 부모님이 말하긴 했어. 내가 정리 하셔야 한다고 말하긴 정리 하긴 했는데, 혹시 정리가 덜 되었니? 바로 정리할께."

"괜찮아. 다음부턴 조심해 줘."




지구 반대편 외국인의 배려와 안내에 고맙다고 말한 뒤, 부모님께는 샤워는 욕조 안에서 하셔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해 뒀다. 하지만 샤워를 잘 하시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다. 스위스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 또 아침 일찍 나가야 한다. 아침 일찍 취리히에서 출발해서, 인터라켄에 있는 숙소에 짐을 갖다 놓은 뒤, 인터라켄을 구경하고 저녁에 체크인 해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여행 일정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짐을 정리해서 1층에 열쇠를 반납하고 길을 나섰다. 아침이 밝아오는 취리히에는 아직 밤의 어둠이 남아 있지만, 떠오르는 해로부터 온 햇살이 조금씩 거리에 내리고 있었다. 그 거리에 사람들이 활발하에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침 시장인 것 같다. 빨리 역으로 가서 열차를 타야 하지만, 아빠가 한번 둘러보고 가자는 말에 잠시 들러서 구경해 보았다. 




화려한 색감의 꽃과 과일들이 좌판에 올라가기 위해서 준비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차에서 물건을 내려 열심히 탁자 위에 진열한다. 큰 페트병에 든 주스가 눈에 보였다. 아침에 사과를 짜내어 직접 만든 착즙 주스라 한다. 한국에서는 착즙 주스가 비싼 편이지만 유럽 쪽에서는 아주 저렴하게 신선한 것을 먹을 수 있을 때가 많았다. 아빠가 주스를 한 병 사자고 하셔서, 주스를 하나 사서 역으로 향한다. 




스위스 안에서 여행을 하기 위해 스위스 패스를 구매했다. 가격도 비싸고 스위스패스가 있어도 돈을 더 내고 타야 하는 구간도 있지만, 스위스 안에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패스를 사고 나서 역 매점에서 간식거리를 산 뒤 인터라켄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치즈와 야채 같은 것들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시장에서 샀던 사과 주스를 먹으며, 열차는 인터라켄으로 향한다. 몇 번의 터널과 호수를 지난 뒤, 기차는 높은 산 아래 에메랄드빛 호수 옆을 달리기 시작한다. 취리히까지 왔을 때는 들지 않았던 스위스 느낌이, 그곳에서 확 들기 시작했다. 




인터라켄 역에서 내린 뒤,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숙소에 짐을 두러 갔다. 급하게 스위스에 숙소를 잡으면서 예산과 이런저런 것들을 고려해야 했던 나는 당시 사진만 보고 호스텔 형식의 숙소 하나를 예약했다. 너른 초원에 마치 극지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천막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는데, 일단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짐을 두고 오는 것 밖에 없었기에 짐을 두고 나왔다. 나는 뭔가 숙소가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은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역으로 돌아가던 길




인터라켄에서 갈 수 있는 가장 유명한 곳이라면 아마 융프라우 일 것인데, 스위스패스만 이용해서는 융프라우에 갈 수 없어 추가 티켓을 끊어야 한다. 내가 일전에 스위스 왔을 때는 돈을 내야 해서 못 올라갔다고 하면서 부모님과 함께 3 명분의 표를 끊는다. 그때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융프라우 표를 끊으면 융프라우 전망대에서 컵라면으로 교환할 수 있는 쿠폰을 많이 뿌렸는데, 나도 그 교환권을 받기 위해 쿠폰을 준비했었다. 근데 따로 교환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쿠폰을 자연스럽게 내어주었다. 한국인이 정말 많이 오나 보다 싶었다. 




인터라켄에서 출발한 열차는 융프라우까지 올라가면서 몇 번의 환승을 거쳐야 한다. 라우터브루넨에서 한번 환승하고, 또 올라가서 중간에서 환승한다. 비탈길을 천천히 올라가는 열차는 중간에 크고 작은 마을들을 지나갔다. 중간에 허리가 굽었지만 건강해 보이는 할머니가 검표를 한다. 부모님의 패스를 보고는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해 준다. 엄마가 그 모습을 보고 나중에 엄마도 그렇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산과 호수를 보면서 열차를 타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높은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산악열차를 타는 것은 스위스 여행의 정체성 같다.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저 멀리 산 위에 쌓인 만년설과 얼음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보기 힘든 것이다 보니 느낌이 새롭다.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산악열차 안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직전에 환승한 산악열차는 산에 뚫어놓은 동굴을 지나간다. 그때 갑자기 고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뭔지 모르겠는데 피곤한 느낌이 확 올라와서 부모님을 맞은 편에 앉혀 드리고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그런데 아빠가 졸던 나를 깨워서 아침에 산 사과주스를 먹으라고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선식을 타서 말이다. 대관절 사과주스에 선식을 타는 것은 왜 그런가 궁금하지만 그건 그렇다 쳐도, 졸다가 깨어나니 기분이 안좋아져서 안먹겠다고 했는데 왜 자꾸 권하시냐, 피곤해서 좀 졸겠다고 하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다시 잠이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터널 끝에는 융프라우 위쪽의 스핑크스 전망대가 있다. 한겨울마냥 눈이 쌓여 있고 저 멀리 거대한 빙하가 보인다. 융프라우는 날씨가 시간 단위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부모님과 갔을 때는 운 좋게 구름 없이 깔끔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얇은 옷을 입고 갔던 나는 추위에 바들바들 떨다가 부모님이 주신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다녔다. 




높은 산 꼭대기인데 어디선가 온 새들이 사람들로부터 밥을 얻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때 반바지를 입고 갔는데, 잠깐 나가는 사이에도 추워서 벌벌 떨면서 겨우 사진을 찍었었다. 사진을 찍고 한번 돌아본 뒤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었다. 한국의 유명 컵라면 광고에 나오는 스위스에서도 판다는 그 컵라면이다. 사실 부모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라면을 잘 먹지 않지만, 공짜로 간식을 준다는데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융프라우의 스핑크스 전망대로 올라가는 터널의 열차




거대한 알레치 빙하의 모습




유치한 자세이긴 해도 기념촬영은 필수다




꼭대기에는 마치 한겨울처럼 눈이 쌓여 있다




융프라우 구경을 하고 나서 라우터브루넨까지 다시 내려와, 뮈렌이라는 작은 마을을 구경하기로 한다. 뮈렌까지 가는 케이블카와 산악열차는, 스위스패스만 있다면 추가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다. 뮈렌까지 가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또 작은 산악열차를 타야 한다. 산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바로 앞쪽 거대한 산의 절벽이 드러나 보인다. 운이 좋다면 그 절벽 앞에서 날아다니는 패러글라이딩도 볼 수 있다.




뮈렌 구경을 하고 나서 다시 케이블카 정거장으로 돌아왔었다. 케이블카 정거장 앞에는 작은 벤치와 테이블이 있는데, 이곳에서 간식을 먹기로 했다. 부모님이 유럽에 오실 때 컵라면과 믹스커피를 챙겨 오시면 여러모로 편할 거라고 말씀드려서 엄마가 챙겨왔었다. 컵라면은 있는데 뜨거운 물이 없어서, 케이블카 정거장에 있는 직원에게 부탁하니 뜨거운 물을 떠다 줬다. 팔팔 끓는 물이 아니라 그냥 뜨거운 물이지만, 어쨌든 다행이다. 




직원에게 감사의 의미로 믹스커피 한 주먹을 선물하고, 부모님과 함께 바로 앞 풍경을 보며 컵라면을 먹었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던 하늘이,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으로 다시 가려졌다. 얼마 전 혼자서 왔을 때는 구름에 가려서 산봉우리가 절반도 보이지 않았다고, 오늘은 운이 좋아서 다행이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믹스커피를 마시고 컵라면을 먹으며, 부모님과 함께 보던 전경




라우터브루넨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인터라켄으로 돌아오고 나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야 했는데, 이날 이런저런 간식을 먹어서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들어가기로 했었다. 인터라켄에 있는 큰 마트를 돌면서 마트 구경도 하고 각자 필요한 것을 샀다.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사과를 들고 와서는 주스 해 먹으면 좋은 사과와 그냥 좋은 사과를 물어봐서 샀다는 것이었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엄마가 어떻게 물어보셨는지 궁금해서 확인하니, 직원에게 손짓발짓으로 물어봐서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아빠를 보면서 엄마는 참 대단하다고, 영어 배운 사람들도 못하는 것을 하고 있다고, 영어 못해도 어디 가서 여행 혼자 하실 수 있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닫히는 마트 정문을 보며 계산을 마치고, 밤 늦게 숙소로 향했다. 이미 짐을 둔 상태였기에 혼자서 체크인 할 수 있게 준비된 상태였고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침에 느꼈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숙소가 아니라, 너른 풀밭에 유목민 숙소 같은 천막을 쳐 놓고 그 안에 침대를 넣어 두었던 것이다. 




천막 하나당 2층 침대가 4개 정도 있었는데, 나와 부모님이 예약한 천막 안에 들어가니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어느 외국인 커플이었다. 그들은 2층 침대 한개의 1층에 한몸이 되어 담요를 덮고 있었다. 부모님과 보기 힘든 광경은 아니라 다행이었는데, 아마 쌀쌀한 날씨에 둘이서 함께 이불을 덮어 열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한테 여기서 주무시면 됩니다, 라는 말을 도저히 하지 못해서 어버버 거리는 사이 천막 아래쪽에 뭔가 손가락 하나 만한 크기의 무언가 붙어 있다. 민달팽이가 아주 천천히 천막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부모님의 표정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고, 아빠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아무리 예산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던 예약을 진행한 내 실책이다. 부모님은 괜찮다 하시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대역죄인이 되어서, 공용공간의 담요를 가져다가 드린다. 




'교훈 2, 부모님을 모시는 숙소는 철저히 알아보자' 




부모님이 주무시는 동안 나는 공용공간의 의자에 앉아서 다음날 저녁에 이용할 다른 숙소를 검색했다. 원래는 그곳에서 2박을 할 예정이었지만, 긴급한 일정 변경이 불가피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괜찮아 보이는 '호텔' 을 제대로 된 것으로 예약했다. 그러는 사이에 어떤 잠 못 이루는 외국인이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나와 비슷하게, 잘 모르는 상태에서 숙소 예약을 한 것 같다. 이봐 친구,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왔다구. 아무래도 내일은 다른 곳에서 자야겠어, 하고 이야기했었다. 




그날 밤은, 유독 피곤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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