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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준 Jun 05. 2022

아직 집에 안갔어?

야근 잔혹사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는 말은 아마 회사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6시가 되면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과는 별개로 과연 6시에 집에 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나는 시간이 되었으니 집에 가겠다는 말을 서스럼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한 사람도 아니고, 그런 용감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한다고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무조건 기다린다. 언제까지? 가라고 할 때까지.




한때 6시면 집에 갈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그 시간에 맞춰 일을 정리하던 때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그것은 오직 내 생각일 뿐임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각과 현실은 항상 다르고, 내가 집에 언제 갈 수 있는지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상황이 결정하는 것이다. 오늘 고생들 했고 먼저 퇴근하니 마무리 하고 들어가라, 라는 최고 결정권자의 이야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들어가라고 말 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이다.


결국 아무도 집에 가지 않고 있기에 나 또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다른 해야 하는 일들을 한다. 꼭 6시 넘어서 해야 하는 일인가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일을 꼭 6시 넘어서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6시 넘어서 집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할 것도 없어져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상황이 된다. 하려고 하면 뭔가는 할 수 있겠지만, 집 가는 시간을 넘겨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 것들이다. 그때가 되면 업무 관련된 것을 하다가 이것저것 다른 것들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회사 안에 있으니 대놓고 다른 것을 할 수는 없다.


이도저도 아닌 시간이다. 일을 하기엔 집중이 되지 않는 시간이고, 일 말고 다른 것을 하기엔 좋은 장소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은 명확하다. 나는 왜 여기에 있고,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나? 더 나아가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가?




흔하디 흔한 야근 중, 묘하게 더 불편해지는 날이 있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어쩌면 마스크가 굳어져 가는 내 표정을 가려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파티션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리를 낮춘다.


일이 너무 많아서 일에 치이며 야근하는 것과, 집에 가란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며 무언가라도 하고 있는 것 중 어떤 것이 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과도한 업무에 빠져 죽으려던 사람들이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어, 아직 집에 안갔어?




집에 가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오고 나면 정리를 한다. 왜 6시에 퇴근을 할 때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다 라고 말하는 문화가 있는걸까?


사실 이 정도의 야근이라면 한국에서 아주 일반적이고 문제거리도 되지 않을 수준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워버린 음식마냥 씁쓸한 뒷맛이 남는 질문들 투성이이다. 그나마 더 늦게 끝나지 않아서 집에서 일일계획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일 지 모른다.




한국에서 야근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야근은 디폴트이다. 2022 04, 서울 여의도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업무 능력이 부족하거나 게을러서 야근을 한다고 할 수도 있다. 너가 열심히 했으면 이미 일을 다 끝냈을 것이고 야근을 할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 성향과 업무 능력을 파악하지 않고 너가 열심히 했으면 다 끝내서 야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정확한 문제 분석이 아닌 듯 하다.




일이 너무 많아서 다음날 까지 넘겼다가는 끝도 없는 업무의 파도에 치일 상황이라 야근을 할 수도 있다. 그와 함께, 제 시간에 집에 가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곳에서 시간은 되었는데 집에 가라는 지시 사항이 없기에 집에 못 가는 상황에서 야근을 할 수도 있다. 아마 이 두 가지가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야근 아닐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야근을 하는가 보다는, 왜 그 조직에 야근 문화가 있는가에 가까워 보인다. 야근이라는 것은 정해진 시간을 넘겨서 일을 하는 것이고, 그런 야근이 일상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일상적인 야근이 문제가 되지 않는 조직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맨 처음 조직 문화를 결정했던 사람들은 시간이 늦어서 야근을 하는 것 정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늦게 야근을 하며 업무를 해 나가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관리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업무 과정은 돌아가기에 야근을 하나 하지 않으나 신경쓸 필요가 없고, 일이 너무 많아서 야근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야근을 하지 않으면 업무가 진행 되지 않기에 야근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일련의 과정이 계속되다 보면, 야근이 이상하지 않은 조직이 된다. 야근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조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조직 문화 속에서, 야근은 떼어낼 수 없게 된다.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는 야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곳에서, 왜 야근을 하냐고 묻는 것과 야근을 하지 않도록 업무 체계를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질리가 없다.


어차피 업무 과정은 돌아가고 매출은 생기기에, 관리자는 야근을 없애려 할 필요가 없다. 야근을 원치 않는 사람도, 자신 빼고 다 야근을 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의견을 낼 수가 없다. 야근 문화가 있는 조직이라는 점, 그 조직 안에서는 야근 문화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느끼게 될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서울의 오피스들은 야근으로 빛난다. 다양한 이유를 가졌지만, 개선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조직에 야근문화가 일상적으로 있을 때, 그걸 없애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것이다. 2018 06,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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