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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Oct 07. 2020

아직 모르는 건 많은 데
밥을 사 줄 나이가 돼버렸다

이젠 모르는 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레고 블록이 섞여 있어도 꼭 같은 모델 블록 찾아 맞추기. 알람 소리 못 이겨 일어나 혼자 중얼거리기. 세수하고 괜히 거울 오래 쳐다보기. 머리 감을 때 눈 감으면 무서워서 눈 뜨고 머리 감기. 머리 말릴 땐 기술보단 그날 운에 맡기기. 집 갈 때 혼자 노래 부르기!(이건 진짜 신나!) 양말 새 거 사겠다 결심하고 한 달 동안 미루기. 친구랑 놀고 싶은데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기. 클래스 101 강의 신청하고 하루 만에 포기하기. 아! 선크림은 비 오는 날에도 바르는 거라면서요?



명절날 여행 가는 건 가족 간 암묵적 룰이었다. 물론 돈이 없으니 국내 여행. 꼼짝없이 집에만 있던 적은 올 해가 처음이다. 덕분에 처음으로 넷플릭스도 결제해봤다.(킹덤 짱 잼!) 티브이를 보면 적어도 싸울 일은 없다. 멍하니 티브이를 보다가 괜히 억울해진다. 망할 코로나.


가만히 있기 억울해 마침 고향 내려온다는 대학 후배를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후배와 대학가 골목을 지나 유명한 타코 집에 들어갔다. 학생 때는 상대적으로 비싼 가게라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갔다. 한 끼 8천 원 짜리 음식 먹고 6천 원 짜리 커피를 아무렇지 않게 계산하는 여유를 즐기게 될 때면 아!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싶다.


대학 후배는 서울에서 직장을 구했다. 부동산을 본다 했다. 같은 경영을 나왔는데 나는 글을 쓰고 후배는 경영스러운 일을 한다. 후배 말은 반 이상 못 알아 들었다. 투자가 어떻고, 요즘 경기가 어떻고, 후배 얼굴은 꽤 말랐다. 그래. 서울 일이 쉽지는 않겠지.


각자 타코를 시키고 버펄로 윙도 시켰다. 나는 내심 먹을 때마다 옆으로 흘리는 타코가 신경 쓰였다. 후배 접시는 깨끗했고 내 접시는 핫소스가 흥건하다. 타코는 서울이 가격이 더 비싸지만 그만큼 맛있다고 했다. 그래? 그럼 나도 코로나 끝나면 한번 가볼래. 글쎄, 그게 언제 끝날지 모르잖아요. 그렇지. 그래도 언젠가는 끝나지 않을까? 그렇긴 하죠. 나는 멀고 추상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후배는 꽤 현실적이었다.


밥을 다 먹고 일어나 계산을 했다. 그래도 대학 선배인데 내가 사야지. 아무렴. 그렇고 말고. 둘이 먹었는데 가격이 꽤 착하다. 나는 기분이 좋다. 대학 거리를 걸을 땐 기분이 좋다. 내가 망설이고 들어가지 못할 가게는 없다. 가격이 착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고, 뭔가 열심히 살았는데 티가 안 나면 그만큼 슬픈 일도 없다만 대학가를 걸을 땐 적어도 초라하진 않다. 후배는 나중 서울에 올라오면 밥 한 끼 하자 했다. 나는 좋다 했다. 그때는 자신이 사겠다 말했지만 나는 아마 서울에 올라가서도 내가 계산할 거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것이 있다. 결혼식장에 가면 축의금도 왠지 학생 때보단 금액도 크게 넣고, 후배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먼저 지갑을 연다. 카톡 최근 대화 상대에 내 친구보단 회사 일로 연락한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집에 들어와 밥 먹고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휴일에는 잠자는 게 더 좋다. 친구 만나러 가기는 힘들어지는 것,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출근할 때 남들은 다들 지하로 내려가지만 나는 아직 1층에서 내린다. 어쩌면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무심히 아침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지하 1층을 누르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직 내 월급으론 가질 수 없는 것. 그건 좀 더 어른이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직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된 것 같으면서도 어른이 되지 못한 체 시간만 지난다.

어른이 되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 몇 가지를 아직 다 챙기지 못하고 출근하는 느낌이다.

이제 나는 모르는 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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