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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짧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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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Nov 16. 2020

4.때론 소중한 걸 애써 잊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놓아줘야 할 것이 있다.

"연락도 뜸하고 해서 나 은근 섭섭했었다."

"미안해.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몰랐어."

규빈은 미안해할 때마다 눈썹이 아래로 처진다. 마치 귀가 축 늘어진 큰 골든 레트리버 같다.

"응? 나 핸드폰 번호 안 바뀌었는데?"

"아니. 꼭 그런 말은 아니고."

규빈은 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누나. 밥 안 먹었으면 밥 같이 먹을래? 오랜만에 내가 밥 살게."

라며 웃는다.




규빈을 처음 만난 건 20대 대부분이 그렇듯 대학교 동아리 었다.

칵테일 동아리. 어른이 되면 좀 근사하게 술을 마셔 보고 싶었다. 하지만 칵테일 바가 무슨 별다방 카페도 아니고 스스럼없이 들어가긴 무서워 들어간 동아리다. 친구 사귀면 같이 치즈케이크에 모히또 한 잔 해야지.

칵테일 동아리.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술 마시며 여자 한번 꼬시고 싶은 남정네들이 한 번씩 거쳐가는 동아리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거의 졸업반 되어서나 알았으니. 나도 어지간히 세상의 끝이다.


규빈이는 내게 처음 연락한 동아리 후배였다. 대학 동아리는 그린라이트. 정확히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나오는 그린라이트.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대학 동아리는 정확히 누군가를 위해 불빛을 켜지 않는다. 그보단 누구라도 내게 와주길 바라는 불빛이다. 제발 한 놈만 걸려라. 내가 지금까지 읽은 연애 소설을 바탕으로 승부 내주마! 대학교에 들어가면 연애 한 번은 내게도 올 줄 알았지. 하지만 새내기로 들어간 칵테일 동아리는 생각보다 소주를 더 많이 마셨고 나는 생각보다 알콜쓰레기었다. 그렇게 칵테일 동아리는 시험공부하다 문득 외롭다고 생각될 땐 빼곤 가질 않았으니 내겐 대학 생활 커다란 그린라이트 하나를 끈 셈이다. 아무리 이론 공부 열심히 하면 뭐하나 실습을 한 번도 못해봤는데.


"안녕하세요. 가현 선배님! 이번 신입생 규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대학생으로 두 번째 벚꽃 구경을 할 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낯선 번호로 카톡이 왔다. 반반한 얼굴의 카톡 프사. 풋풋한 얼굴이었다. 아이구 귀여워. 근데 얘는 누군데 나한테 선배라고 연락하는가. 개강 후 여러 술자리를 기억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애는 없었다. 과 후배는 아니고. 스터디 사람도 아니고. 우선 대강대강 인사 톡을 보냈다. 일단 얼굴은 잘생겼으니까. 누군지 잘 알지 못해도 대화는 가능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서로 제대로 모르고서 카톡을 이어갔다. 그동안 설마 얘가 동아리 후배일 거란 생각은 못했다. 나중에 규빈이에게 이번 M.T때 오냐는 톡을 받고서야 이 친구가 칵테일 동아리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땐 그렇게 적당히 거리 두고 이야기하는 게 좋았어. 사회생활이란 게 좀 무섭더라고. 사실 뭐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데 다들 웃으면서 다가오고 그랬으니까."

집에 가서 남은 된장국이나 데워 먹으려 했었던 나는 어느새 새우 파스타를 말고 있다. 나쁘지 않다. 게다가 생각도 못한 공짜밥이니. 그래. 규빈아. 나도 사실 그때 좀 설렜다. 이 누나도 순정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겨. 그렇게 서로 얼굴 한 번 안 보고 열심히 연락했으니까. 나름 요즘 연애 어플 같은 걸 우린 미리 해본 거지. 나도 그때 모르는 사람이 선배, 선배 하면서 연락하니까 설레더라고."

"그러니까. 그때 우리 연애 어플 프로그램 창업했으면 돈 좀 벌었으려나."

"아니. 그건 좀 아니다."

"크크. 그치?"

그때 그렇게 규빈이와 얼굴도 모른 체 시작했던 카톡은 나중엔 서로 고민 상담까지 하게 됐다. 가끔은 잘 모르는 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모른다는 건 내 상상을 채울 수 있다. 만약 내 상상이 틀리더라도 잘 모르는 사람이니 자연스럽게 발을 끊으면 되기도 하고.


"야. 근데 요즘 뭐하고 지냈어. 연락 한 통도 없드만."

"그냥. 그랬지. 어른이 되다 보니까 가끔은 소중한 것도 일부러 잊어야 할 때가 있더라고."

규빈이는 특유의 눈썹을 내리며 웃는다.

"응?"

"내 감정이 남에겐 부담이기도 하더라. 그럴때 있잖아. 카톡 '생일인 친구' 목록에 뜨는데 이젠 생일 선물을 보내면 안 될 거 같은 느낌. 걔는 날 잊었을 텐데 하는 거."

규빈이는 변한 게 하나 없구나 싶다.



"누나. 자요?"

"응. 아니. 왜? 이 늦은 시간에 연락을 다하고?"

"있잖아요. 가끔 연락하고 싶어도 저는 참아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러니까 나 혼자 막 슬퍼져."

"괜찮아. 대학 생활이 아직 낯설어서 그래."

"그렇겠죠?"

"그럼. 나도 그랬어. 막 과방 들어가기 무섭고, 또 친해지고 싶은 데 걔는 날 어떻게 생각하나 무섭고. 나도 그랬지."

"그렇죠? 괜찮은 거겠죠?'

"그럼. 괜찮아. 모두 괜찮아질 거야."

"그래요. 괜찮아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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