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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짧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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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Nov 10. 2020

3.편집. 자르고 들어내고 다시 편집.

보기 싫은 건 편집.




은엽 아카시아. 넉줄고사리. 다 쓴 향수병 모으기. 자기 전에 라면 먹기. 에디 레드메인. 고양이 사진 찍기. 노란 전등. 폭신한 러그. 출근길에 건너는 돌다리.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 파란 하늘. 낯선 파란 하늘. 가을 하늘. 갑지가 찾아오는 가을 그리고 겨울. 나는 겨울이 싫다.


"뭐야. 시간 된다면서."

"미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

현 오빠의 급한 일은 대게 이기적인 편이다. 물론 자기는 절대 모르겠지만. 항상 약속에 늦고 항상 피곤하고 항상  미안해하고.

"아저씨! 그럼 밥은 언제 해줄 거야?"

"어. 다음 주 어때? 아니 내일 모래도 괜찮다. 언제든 와. 괜찮아. 진짜 이번만 봐주라."

오빠와 약속은 매번 어렵다. 어떻게 약속을 잡아도 매번 늦었다. 다른 모임을 끝내고 오는 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모임에서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어물쩡거리다 늦는 일이 많았다. 오빠는 한 번도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뻔하다. 매번 만나서 같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초초해하는 눈빛과 자주 쳐다보는 핸드폰. 나는 알 수 있지만 그냥 모른척한다.

"아. 몰라 졸러."

"몇 시에 일어났는데 벌써 졸려."

졸리다. 잠시 눕고 싶다.

"가현아. 다음에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차라리 말이라도 말지. 마음 없이 하는 그런 말은 자기 마음에 짐을 남기기 싫어 던지는 그런 거겠지. 아 몰라. 졸려.


김 팀장은 이번 납품 영상 절반 정도를 날리라고 했다.

"아니. 이렇게 만들면 좀 곤란하지. 이건 니 개인 작품 활동이 아니잖아?"

억울하다. 나도 당신한테 그런 말 들으면서 일하는 건 좀 곤란하지. 처음 레퍼런스 보여줬을 땐 좋다고 해놓고선. 오늘 조금 지각했다고 이렇게 보복하는건가? 그렇다고 외주 작업물에 이렇게 분풀이하겠다고? 어이가 없지만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아 노트북 검은 화면을 바라본다. 편집. 삭제. 삭제. 삭제. 영상을 기계적으로 들어내고 자르고 내 마음대로 다시 고친다. 아니 우리 클라이언트 마음에 맞춰 다시 자르고 붙인다. 수정. 수정. 수정.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퇴근길. 지하철을 타고 그냥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지하철 안은 답답하다. 딱히 볼 바깥 풍경도 없다. 어두운 굴 속을 빠르게 지나간다. 어둠은 빠르게 지나간다. 원래는 현 오빠가 해주는 밥을 먹고 좀 쉴까 했는데.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눈을 감으면 나는 어둡다. 편집. 잠을 자면 그건 편집. 집에 얼른 들어가 자고 싶다  편집. 편집. 편집. 보기 싫은 건 편집. 내 오늘 기분도 그냥 편집. 아니 그냥 삭제. 나는 이제 어른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눈을 감으면, 잠을 자면 그 순간 기억은 삭제된다. 컨트롤, 시프트 그리고 o. 아니, 기분은 x.


한 반쯤 지났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들인다. 그리고 낮게 들리는 목소리.

“누나. 오랜만이야.”

한때 익숙했지만 잊고 있던 목소리에 놀라 고갤 돌린다.

“뭐야. 진짜 자고 있던거야?”

낯익은 얼굴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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