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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Jan 25. 2021

5.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는 사람

그게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싶다

"넌 요즘 뭐하고 지내?"

"그냥. 그렇저렇 지내지."

"그게 뭐야."

"글쎄. 이게 뭘까."

미현이 웃는다. 그럼 나도 따라 웃는다. 네가 왜 웃는지는 잘 알지 못한 체




너는 갑자기 날 왜 찾았는지, 어떤 말을 듣고 싶은건지, 아니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 해 웃는다. 

"참 우리 만난 날도 오래다. 그치?"

돌이켜보면 나도미현과 이렇게 오랜 인연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처음 신입생 M.T.에서 만났을 때도, 어쩌다 교양 수업 시간이 겹치게 되었을 때도 나는 차라지 네가 날 지나가길 바랐다. 내 눈에 미현이 보이지 않길 바랐다. 나는 그토록 찌질했다. 고백하기엔 용기가 없었고 도망치기엔 미련이 가득했지.


"이렇게 나와 주고 밥도 사주고 진짜 고맙다. 역시 친구가 좋긴 좋아. 그치?"

미현과 그렇게 오래 만났으면서도 오늘처럼 단 둘이 술을 마시긴 처음이다. 이제 일도 시작했고 좀 더 좋은 곳에서 밥을 사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파스타보면 스테이크로, 소주보단 와인으로. 미현의 전화를 받은 후 괜찮은 스테이크집을 검색했다. 가격대를 비교할까 하다가 기분이다 싶어 그냥 제일 예뻐보이는 식당을 예약했다. 낮은 천장과 은은한 조명이 적절한 감상에 젖게 했다. 나는 너를 여러번 마음 속으로 찔러 보았고 너는 그걸 알지 못했겠지. 내 오랜 시간의 미련은 굳고 굳어 이제 나도 내 본심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냥 파도를 견디는 바다 한 가운데 부표처럼 나는 너에게 휩쓸린다. 


"근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서울일 바쁘지 않아?"

"나 서울에서 내려온 지 꽤 됐어."

"정말? 상상도 못했네. 하던 일은 어떻게 하고?"

"잠시 쉬려고. 뭐 나중은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래. 오늘 만나길 잘했네. 좋은 식당 알아보길 잘했어."

"그래. 고맙다 야. 우울할 뻔 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좋네."


 미현은 알코올 때문인지 내가 편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식당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나는 그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비켜야 할 때가 온다. 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찌질해 지는 때가 온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밀려나는 것들이 많다. 나는 여자들과 곧잘 친하게 지냈다. 나는 그토록 외로웠다. 모든 건 떠난다. 나는 그 중 무엇도 붙잡지 못한 체 떠내려 간다. 그러나 지금은 외롭지 않다. 나는 괜찮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해도 나는 너의 웃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걸로 괜찮다. 아직은 너와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아직은, 아직은 곁에 있어도 되는 것 같다.


"요즘 무슨 생각해?"

"나?"

"응."

"뭐. 별거 없지. 언제나 이너 피스 유지랄까."

"에이 또 시시해."

"뭐가?"

"매번 그렇잖아. 넌 매번 니 얘기 잘 안하잖아."

"그러게."

"그래도 뭐 좋아. 오늘 기분 좋네."




날이 저문다. 미현을 본다. 그리고 가현이가 생각났다.

핸드폰엔 메시지 하나가 와 있다.

'다음엔 내가 원하는 거 아무거나 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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