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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문하는 임정아 Nov 13. 2022

엄마와 나

해와 달이 된 모녀


사랑이란 우주적 동작이다
내가 너를 보았다는 신호를 보내라

-구본형 (세월이 젊음에게)



엄마와 나

(언제부턴가 집에 가면
엄마는 늘

내일 가끼가?

부터 묻는다

그 내일이 일요일이니 당연히 가야 되는 걸 알면서

그리곤

또 언제 올 거고?
묻는다
나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응대한다
엄마 우리 자주 오잖아

두 달에 세 번은 가는데
엄마는 늘 아쉽다한다

이 밤 엄마가 손질해준 파로
파김치를 담다가

괜히 엄마가 보고 싶네
파가 매워서 눈물도 나고 ㅎ

엄마 잘 자요  아푸지마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2014년 적은 글이다.

요즘은 두 달에 한번 겨우 엄마를 보러 간다. 나의 삶에 충실하느라 마치 과거의 인연처럼 버려두진 않았는지...

나의 깊고 긴 우울은 엄마의 무관심으로 생긴 것이라고 원망하고 살았다. 아픈 아들에게 쏟은 사랑과 관심 이면에 그 아들을 뛰어넘으려는 딸은 꼴 보기 싫고 같잖은 존재였으리라 스스로 정의 내리곤 했다. 경험한 일들 속에서 반은 증명이 되기도 했으니.

파킨슨 진단을 받은 엄마를 보며 가슴이 저릿하다가도 미움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곤 했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은 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과연 그랬을까? 엄마에게 있어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픈 손가락은 그 아들 하나였을까?

동생이 기억하는 엄마는 한없이 인자하고 사랑 많은 모습이란다. 현재 나의 딸들에게도 사랑 많은 외할머니이고. 그렇다면 내 기억의 왜곡일까? 작은 실수에도 득달같이 달려와 화를 내던 엄마는?


모르겠다. 밤에 뜨는 달과 낮에 뜨는 해는 서로 만날 수 없다. 때로 낮달이 목격되기도 하지만 엄마와 나 사이는 멀고 멀다. 해와 달이 된 우리 사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자주 표현하란다. 내가 엄마를 보고 있다고 신호를 보내야 한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모순이다. 나의 경우는 '부모 이기는 자식 없다'가 맞다.

어쩌다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는 늘 나를 호출한다.

'아버지가 바지락을 캐놨으니 가져가라.' '무를 뽑아놨으니 가져가 김치 담가라' 요구도 가지가지다.


구본형 강독을 듣고서 왜 엄마 생각이 났을까?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신호를 더 자주 보내야겠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해서 내가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 엄마가 노쇠해지는 걸 알았다. 자식은 늘 한 박자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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