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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질문하는 임정아 Apr 18. 2024

왜 나만 그래야 해

백 가지 중 한 가지

"큰아들은 첫정이라 그런지 낳아서도 좋고 기르면서도 좋고, 그래 좋더라.

너거 아버지 리어카 끌고 내려오다가 그대로  굴렀으면 큰일 났을 낀데 그랬으면 나는 너거 아버지랑 안 산다. " 작은 리어카에  짐을 산더미처럼 쌓아 큰오빠가 끌고 아버지가 밀고 내려오다 가파른 고갯길에서 아버지가 리어카를 놓치고 말았다. 지켜보던 엄마는 아버지가 어찌나 밉던지 큰 오빠가 운동 신경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넘어져 짐밑에 깔렸을 거라며 이를 갈았다. 생각만으로도 분이 안풀리는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말이다. 그렇다. 엄마에게 큰오빠는 첫정이며 아버지 대신 집안을 이끌어갈 기둥이기에 우리 셋보다 더 각별하다고 늘 강조했다. 우리도 바다 나간 아버지 대신 큰오빠가 어른이였고  울타리 같이 든든하고 믿음직했다. 작은 오빠는 아픈 손가락이어서 무엇이든 허용이 되었다. 새로 산 워크맨도 차지하고 새로 산 겨울 점퍼도 가장 먼저 자기가 입고 맛있는 반찬을 혼자 차지해도 잔소리를 피해 갔다. 어쩌다  내가 먼저 그 워크맨을 들고나가는 날에는  난리가 났다. 가스 나가 오빠 거를 들고나갔다며 엄마도 합세해서 나를 몰아세우곤 했으니까.  4남매 중 셋째라는 슬픈 운명은 사춘기 시절 나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인자하고 사랑표현이 많은 엄마에게 자랐다면 타고난 나의 감수성이 제대로 빛을 발휘해서 그림을 그리거나   작사가가 되어 있을 텐데.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날씨 변화에 민감했다. 봄이 오기 전 보리밭에서 풍기는 풀내음  여름이 오면 아카시아 향기, 가을이 오면 황금빛 밀과 벼가 넘실대는 벌판. 산딸기를 따겠다고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작은 오빠와 옥녀봉을 누비던,  온갖 꽃과 나무가 옷을 갈아입는 가을에는 책갈피로 쓰겠다며  나뭇잎을 모아댔으니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을까? 매일 꼴을 배러 들에 나갔다오면 배고픈 소를 위해 소죽을 끓여야 하고 마당에 매어 놓은 메리(강아지)밥도 챙겨야 하고 식성 좋은 돼지까지 쳤으니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런 엄마를 도와야 하는 내가 매일 공상가처럼 책 읽는 모습도 엄마는 싫어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집에 오면 집안일을 도우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으므로 있는 집 딸처럼 빛고운 원피스 입고 한가로이 자연을 돌보거나 관찰하는 것은 사치였다. 부자집  딸로  태어나 가난한 어부의 아내가 된 엄마는 그 고단함을 나에게 풀었다. 설거지며 마루 광내기  마당 쓸기 개밥 주기 소죽 끓이기, 안해 본 집안일이 없다. 게다가 해가 뉘엇뉘엇 지는데도 엄마가 집으로 오지 않으면 저녁밥을 짓는 것조차 내 몫이었다. 큰오빠는 텔레비전 보고 작은 오빠는 친구들과 논다고 들어오지 않고 여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말귀 알아듣고 손이 빠른 내가 엄마의 가사 도우미로 적격이었나 보다. 그렇다고 그 일을 해낸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억울하고 슬픔이 쌓여 가기만 했다. 나의 빛나는 10대는 그렇게  불만 속에서 흘러갔다. 그나마 중학생이 되니 통학선을 타고 학교를 오가는 시간 때문에 집안일에서 조금 해방되었다.


섬에서 육지로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통학선을 타고 움직여야 했다. 새벽 6시에서 7시 30분 두 번 운항하는 통학선을 1차 2차로 나누어  타고 중학교로 향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쓴다 해도 옷은 절반이 젖은 채로 수업에 들어갔다.  어떤 날은 머리를 다 말리지 못한 채 배에 오르면 앞머리가 고드름처럼 얼어 있기도 했다.  차가운 바다를 가로질러 볼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15분 나아가면 학교로 가는 선착장에 닿았다. 차례차례 조심조심 선착장에 내려서면 줄을 지어 학교로 출발한다. 거기서 학교까지 또 15분 걸어 올라간다. 네모 반듯한 운동장에 키가 크고 잘생긴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서 계신다. 느티나무 가지가 선생님 어깨 위에 드리워져 아직 20대인 선생님을 더 젊어 보이게 했다. 선생님 ...그 시절 선생님은 나에게 오빠같고 아빠같고 때로는 친구 같은 존재. 체력장을 해야 하는데 생리통으로 힘들어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스탠드에 앉아 친구들이  100 m 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굴이 벌개진 채 철봉에 매달린 아이, 윗몸 일으키기 42개를 위해 온 힘을 짜내어 몸을 들어 올리는 아이, 느티나무 아래 서서 아이들 기록을 적는 선생님... 학교에 있는 시간이 즐겁고 좋았다. 집안일 걱정이 없었으니까.


3 학년이 되면서 중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체육 선생님 하숙집 바로 옆이었다. 아침 7시면 '담다디' 노래가 전축을 통해 흘러나왔다. 선생님도 일어나셨구나 우리도 일어나 아침밥을 지었다. 등교할 때는 선생님이 한 번씩 살피러 오셨다. 밤새 잘 잤는지, 아침은 잘 먹었는지, 설거지는 했는지 ... 얼마 전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 왜 그때 그렇게 설거지를 제 때 안 하고 다녔냐고 잔소리를 하셨다. 그때는 어린 아이라 혼내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고작 여자아이 둘이서 자취를 한다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었을까?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어쩌다 운이 좋은 날 참치캔 하나를 뜯어 밥을 비벼 먹었다. 고추장 숟가락에  참기름 조금, 그렇게 훌륭한 레시피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밥맛이 꿀맛이었다.


 토요일은 3교시 끝나면 다시 통학선에 올라 집으로 갔다. 일주일 만에 집에 가면 역시나 걸레빨기 마루닦기  메리 밥 챙기기 소죽끓이기가  이어졌다. 어떤 날은 빨갛게 타오르는 불앞에 앉아 불멍을 때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꿈꾸는 건 ' 이게 현실이 아니기를', 언젠가 좋은 차를 탄 부부가 찾아와 내 딸을  돌봐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나에게 내미는 꿈을 꿨다. '분명 나에게는 다른 삶이 있을 거야.'그렇게 힘든 날들을 버텼다. 소죽을 끓이다가 뜨거운 김에 손가락을 데기도 하고 찬물에 걸레를  빨아 쓰기 때문에 손이 터서 시리고 따갑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학교생활은 재밌고 즐거웠다. 미란이  수정이 란지 친구들이 늘 곁에 있었다. 청춘 사진관에서 사진 구경도 실컷 하고 학교 느티나무 아래에서 게임도 하고 소풍 길에는 '마이마이'를 들고 이어폰을 꽂고 똥폼을 잡아보기도 했다. 앞머리를 세우느라 요구르트도 발라보고 '청청 패션' 맞춰 입고 읍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통영까지 나가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맛이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무엇이든 열정을 다 바쳐서 열심히 해야 속이 시원했다. 내 안에 꿈틀대는 뜨거운 열기를 시키려면 밖에서 그 에너지를 다 쏟아내고 집으로 가야 했다. 집안에서는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여중생으로 살아야 했다. 지금 엄마에게 묻곤 한다. "왜 나만 그래야 했어?" 그때는 감히 묻지 못했던 말들이다. "왜 나만 그래야 해 ?"그 시절 내가 조금 더 용감했다면 그 많은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엄마의 변명같은 대답은

"나도 모르겠다. 기억이 하나도 안나네. 니는 내가 아흔 아홉 가지를 잘해주고 한 가지 못해준 걸 기억하고 그라노."였다.

나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상처가 엄마에게는 기억도 안나는 백가지 중 한 가지라니.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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